지구가 얼마나 완벽하게 둥근지 인류가 눈으로 확인한 것은 1972년이었다. 그해 12월 미국의 유인우주선 아폴로 17호가 발사됐다. 달을 향해 날아가던 우주비행사 3명이 스웨덴제 70㎜ 하셀블라드 카메라로 지구를 촬영했다. 이륙 5시간6분 만에, 4만5000㎞ 떨어진 곳에 가서야 지구를 통째로 렌즈에 담을 수 있었다.
마침 태양이 아폴로 17호를 가운데 놓고 지구의 반대편에 있어 둥근 지구가 일그러짐 없이 렌즈에 잡혔다. 동지(冬至)를 앞둔 때라 하얀 얼음에 덮인 남극대륙도 선명했다. 푸른 바다와 불그레한 아프리카, 인도양의 사이클론까지 어우러진 그 모습이 아름다워 나사(NASA)는 이 사진에 ‘블루 마블(푸른 구슬)’이란 이름을 붙였다.
끝이 어딘지 모를 캄캄한 우주에서 홀로 반짝이는 사진 속 지구는 자칫 구슬처럼 깨질 것만 같았다. 외로워 보여서, 약해 보여서,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사람들에게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진은 환경운동이 대중에 확산되는 촉매 역할을 했다.
아폴로 17호가 블루 마블을 보내오기 6개월 전. 1972년 6월 5일 유엔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유엔인간환경회의'를 개최했다. 국제사회가 지구 환경 보전을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다짐한 첫 번째 국제회의였다. '인간환경선언'이 발표됐고 유엔 산하에 환경전문기구인 유엔환경계획(UNEP)이 설치됐다.
지구를 개발하느라 바빴던 인류가 마침내 지구 보호를 위한 행동에 나서던 참이었다. 인간환경회의가 열린 6월 5일을 '세계 환경의 날'로 지정하며 사람들에게 관심을 호소할 때 '푸른 구슬' 블루 마블이 공개됐다. 이 사진은 곧 환경운동의 상징이 됐다.
우리나라도 1996년에 6월 5일을 법정기념일인 '환경의 날'로 제정했고, 이듬해 서울에서 UNEP '세계 환경의 날' 행사를 개최했다.
◇ 앨 고어의 블루마블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은 1993년 백악관에 입성하자 나사에 초대형 블루 마블을 요청해 집무실에 걸었다. 그가 백악관에 머문 8년간 이 사진도 그 자리를 지켰다. 1998년 그가 “지구의 다른 곳이 찍힌 블루 마블을 보내 달라”고 했을 때 나사의 답변은 “그런 건 없습니다”였다. 아폴로 17호 이후 인류는 달에 가지 않았다. 완벽하게 둥근 지구의 ‘풀샷’은 이 사진 하나뿐이었다. 여러 버전이 있지만 인공위성이 조각조각 찍은 사진들을 합성한 것이다.
고어는 나사 국장에게 “지구의 환경 변화를 보여주는 풀샷을 우주에서 실시간 전송해줄 위성을 개발하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우리 인류는 모두 같은 행성에 살고 있으며, 같은 위험과 기회를 맞았으니 같이 책임져야 한다는 걸 세계에 알리자”는 취지였다. 나사는 ‘고어샛(Gore+Satellite)’이란 별칭의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만약 그가 2000년 대선에서 승리했다면 고어샛은 훨씬 일찍 발사됐을 것이다. 부시 정권에서 캐비닛에 들어가 있던 이 프로젝트는 오바마 정권이 출범한 뒤 재개돼 2015년 2월 심우주기상관측위성(DSCOVR)이란 공식 명칭으로 발사됐다. 160만㎞를 날아 예정된 궤도에 올라선 그 해 7월, 고어샛은 17년 전 고어가 나사에 주문했던 ‘다른 블루 마블’을 지구로 전송했고 세계 언론에 이 사진이 실렸다.
◇ 18년만에 체결된 파리기후협정
그로부터 5개월 뒤 195개국이 프랑스에 모여 온실가스를 함께 줄이자는 ‘파리협약’을 체결했다. 모태가 된 ‘교토의정서’가 나온 건 1997년이다. 고어가 부통령일 때 주도했던 미완의 의정서는 고어샛처럼 18년이 지나 온전한 협약이 됐다.
2001년 백악관에서 나와 환경운동가로 변신한 고어는 친환경 기업에 투자하는 회사를 차리고 국제 환경단체 기후프로젝트(CRP)를 설립했다. 기후변화의 위험을 경고한 2006년 다큐멘터리 ‘불편한 진실’부터, “한국이 역사적인 법안을 통과시켰다”며 2012년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 도입을 팔로어 240만명에게 알린 트윗까지 그가 줄곧 해온 일은 세계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15년을 보낸 뒤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를 앞두고 고어는 AP통신 인터뷰에서 이례적으로 ‘낙관적’ ‘희망적’ ‘긍정적’이란 표현을 16차례 사용하며 “우리가 기후변화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고어샛과 제2의 블루 마블, 파리협약이 2015년 나란히 성사된 배경에는 신념을 가진 정치인의 오랜 노력이 있었다.
◇ 푸른 구슬, 트럼프에 깨질 위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구온난화를 음모론이라고 주장한다. 지구온난화는 인간의 산업활동으로 발생한 온실가스의 영향보다 태양 활동에 의한 자연현상이라는 비주류 학자들의 주장을 맹신하고 있다. 2012년 11월 7일 이런 트윗을 날렸다.
“너무 춥고 눈도 많이 오는 뉴욕. 지구온난화가 필요해!(It's freezing and snowing in New York. We need global warming!)”
2013년 5월 26일에는 트위터에 이렇게 적었다.
“밖이 매우 춥다. 지구온난화가 도대체 어디 있다는 거야?(It's freezing outside, where the hell is global warming?)”
그는 이 트윗에서 5월 하순에 느낀 추위를 이상하게 여겼지만, 그런 이상기후가 지구온난화의 여파라는 학계 정설을 무시했다. 지구온난화를 ‘환경 상업주의자’ 또는 유럽과 중국이 미국 경제를 견제하기 위해 벌이는 '공작'으로 몰아갔다. '음모론'이 백악관을 점령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구온난화를 부정하는 논리는 단순하고 빈약하다. 자신이 추위를 느끼면 음모론을 제기해 왔다. 트위터 계정을 연 2009년 5월 5일 이후 ‘매우 춥다(It's freezing)’고 적은 7건의 트윗은 모두 지구온난화를 부정하는 내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나사와 해양대기관리청(NOAA)은 지난해 지구 평균 온도가 14.83도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20세기 평균 온도보다 1도 가까이 상승했다. NOAA가 1880년 기후 관측을 시작한 뒤 가장 높았다. 트럼프는 이런 자료를 인용하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파리협정의 비구속적인 조항 이행을 전면 중단한다”고 밝혔다. 그는 “파리협정이 미국 경제를 해치고, 미국 근로자들을 좌절시키며, 미국의 주권을 약화시켜 미국의 경쟁력을 떨어뜨린다”고 말했다. 파리협정 탈퇴 선언은 그가 그동안 주창했던 미국 우선주의의 결과였다.
세계 195개국은 2015년 12월 프랑스 파리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총회에서 온실기체에 대한 획기적 감축, 지구 평균기온 상승 억제를 약속했다. 이 파리협정의 발효 시점은 지난해 11월이었다. 당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2025년까지 온실가스를 2005년 대비 26~28% 감축하고, 2020년까지 30억 달러를 개발도상국에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빌 클린턴 정부의 앨 고어 부통령이 시작해 조지 W 부시 정권에서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보냈고, 오바마 정부 들어 다시 힘을 낸 끝에 마련된 미국의 '세계 환경 리더' 로드맵은 트럼프 정부에서 백지화될 위기를 맞았다.
블루 마블을 지키려고 기후변화에 맞서 싸움을 시작한 세계는 이제 그 싸움을 방해하는 트럼프 정권까지 상대해야 하게 됐다. 트럼프는 일부러 '세계 환경의 날'에 맞추기라도 한 듯 공교로운 시점에 '선전포고'를 했다. 결코 쉽지 않은 길이 지구 앞에 놓였다.
태원준 김철오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