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불, 검은 연기…분쟁지 카슈미르 아이들이 그린 세상

입력 2017-06-01 15:11
BBC 웹사이트 캡처

그림 속 남자 아이는 책을 들고 서 있다. 아이 얼굴을 향해 검은 총알들이 날아온다. 이를 보고 싶지 않은 듯 아이는 짙은 검정 선글라스를 끼었고, 얼굴에는 총알의 흔적이 점점이 묘사돼 있다. 양손에 쥔 책의 새빨간 표지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총알의 희생자는 글을 읽고 쓰고 싶다! 아름다운 것도 보고 싶다!

이 그림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에 걸쳐 있는 카슈미르 지역에 사는 아이가 그렸다. 한때 시인들은 카슈미르를 파라다이스라 불렀다. 무굴 황제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듯 그곳의 초원과 시내, 과수원과 산은 카슈미르를 “지상 천국”이게끔 했다.

BBC 웹사이트 캡처

하지만 카슈미르 영유권을 둘러싼 인도와 파키스탄의 지난한 분쟁은 파라다이스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카슈미르의 아이들이 그린 그림은 피와 불을 표현하는 붉은 색과 하늘을 뒤덮고 땅을 그을린 검은색으로 가득하다. 돌을 던지는 시위대, 총격전을 벌이는 군인, 불타는 학교, 잔해로 뒤덮인 거리, 그리고 살인은 아이들의 도화지에 반복해 등장하는 소재가 됐다. 영국 BBC방송은 최근 이 그림들이 현재의 테러와 미래에 대한 공포를 보여준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7월 카슈미르 독립운동을 이끌던 지도자 부르한 와니가 인도 정부군에 의해 사망했다. 이에 격분한 시위대와 정부군이 충돌하면서 약 4개월 동안 100명 넘는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정부군은 항의하는 군중에 총을 쐈고 많은 사람이 다쳤다. 

9000여명 부상자 중 1200여명이 15세 이하의 어린이였다. 이들 중 상당수는 시력을 완전히 잃거나 한쪽 눈을 잃었다. 이런 모습을 너무 많이 목격한 탓인지 BBC가 보도한 아이 그림 중에는 오른쪽 눈에 안대와 반창고를 붙인 여자 아이가 등장한 것도 있었다.

BBC 웹사이트 캡처


거리에 폭력이 늘어나면서 학교도 문을 닫았다. 수개월간 아이들은 실내에 머물며 TV 뉴스의 소음에 빠져 있어야 했다. 아이들은 친구들을 만날 수도, 크리켓 경기를 할 수도 없었다.

학교들은 다시 문을 열었지만 많은 학생들이 여전히 불안 증세를 보였다. 한 학교 교장은 “아이들이 좀비처럼 창백해보인다”고 표현했다. 몇몇 아이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비명을 지르거나 테이블을 세게 때리고 가구를 부수기도 해 상담사들을 불러 진정시켜야 했다.

그런 다음 약 300명 학생들이 강당으로 가 종이와 파스텔로 그림을 그렸다. 교장은 “학생들은 각자 원하는 것을 그렸고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며 “매우 카타르시스적이었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그림에 말풍선이나 헤드라인을 통해 글을 써놓기도 했다. 한 학생은 “나는 세상과 내 친구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나는 맹인이다”라고 적었다.

BBC 웹사이트 캡처

한 시인은 어린 시절이 누구도 죽지 않는 왕국이라고 했다. 하지만 적어도 카슈미르 아이들은 늘 죽음의 그림자 아래에서 살아왔다. 그림 속 거리에도 시체와 불타는 사람들이 있다.

한 소년은 “여기는 카슈미르의 산이다. 이곳은 아이들을 위한 학교다. 왼쪽에는 군인들이 있고 반대편에는 자유를 요구하며 돌을 던지는 시위대가 있다”며 자신의 그림을 설명했다. 이어 “시위대가 군대에 돌을 던지면 군대는 총을 쏜다. 총격전에서 아이가 죽고, 친구는 홀로 남겨진다”고 덧붙였다.

학생들이 그린 그림의 또 다른 주제는 불에 타 무너지는 학교였다. 아이들이 불타는 학교에 갇혀 비명을 지르는 그림 왼쪽에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우리 학교, 우리, 우리 미래를 지켜주세요!”라고 적혀 있다.

BBC 웹사이트 캡처

어떤 그림은 좀 더 격앙돼있거나 정치적 메시지까지 담겼다. 자유를 요구하는 그래피티와 “우리의 카슈미르를 구하라”는 표식이 있는가 하면, 부르한 와니를 찬양하고 인도에 반대하는 슬로건을 내걸기도 한다. 두 쪽으로 나뉘어 일그러진 남성 얼굴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쓰리고 곪아터진 대립관계와 두 국가 사이에 낀 카슈미르의 비극을 상징한다.

호주의 예술치료사 데나 로렌스는 5년 전 이곳 아이들과 함께 미술수업을 했다. 그는 아이들의 그림에서 검은색이 가장 두드러지고, 대부분은 “화, 분노, 우울”을 반영한다고 말했다. 지난 40년간 4~16세 아이들의 미술대회를 심사해온 카슈미르 예술가 마수드 후세인은 “아이들은 평화에서 폭력으로 옮겨 갔다 ”며 그림 주제가 변했다고 설명했다. 또 “아이들은 붉은 하늘과 붉은 산, 호수, 꽃과 집이 불타는 집을 그리고, 총과 탱크, 총격전, 길가에 쓰러진 사람들을 그린다”고 덧붙였다.

스리나가르의 정신과 의사 아사드 후세인은 “우리는 아이들이 너무 어리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며 “아이들은 주변의 모든 것을 흡수하고 이해하며 자신의 방식대로 표현한다”고 말했다. 또 “이 작품들은 집에 머물러 있는 아이들이 그린 것”이라면서 “폭력에 더 가까운 곳에 있는 아이들은 어떨지 상상해보라”고 말했다.

카슈미르에서는 동화가 재빨리 악몽으로 바뀌고 있다. 하지만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한 소녀는 그림에서 “우리의 미래를 밝게 만들자, 교육을 받게 하자, 이 위기를 어둠의 이유로 만들지 말자”고 호소했다.

권중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