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 ‘좋아요’를 누르는 것만으로 명예훼손이 성립된다는 판결이 스위스에서 처음 나왔다.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판결이란 비판이 제기되는 가운데 'SNS 명예훼손'에 대한 명확한 기준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스위스 취리히지방법원은 동물권리운동가 에르윈 케슬러를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식으로 비난한 여러 댓글에 ‘좋아요’를 누른 A씨(45)에게 벌금형을 선고했다고 29일(현지시간) 밝혔다. 항소를 제기하지 않을 경우 A씨는 4000스위스프랑(약 460만원)을 물어야 한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A씨가 '좋아요'를 누른 게시물은 2015년 작성됐다. 당시 페이스북의 여러 페이지에서는 동물보호단체가 비건(채식주의자) 축제에 참가해도 되는지를 놓고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케슬러를 비난하는 게시물이 여러 건 올라왔다.
게시물에는 “케슬러가 인종차별주의자이며 반유대주의자, 파시스트”라는 주장이 담겼다. 또 “케슬러가 운영하는 단체는 신(新)나치 단체"라고 비난했다. 이후 케슬러는 게시물 작성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여러 건에서 승소했다. 하지만 이런 비난성 게시물에 '좋아요'를 눌렀다는 이유만으로 유죄 판결이 나온 건 처음이다.
재판부는 “좋아요를 누르는 건 그 발언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명확한 행위”라고 선고 이유를 밝혔다. A씨가 '좋아요'를 누른 게시물은 A씨의 페이스북 친구와 팔로어들에게도 공유되기 때문에 A씨가 케슬러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봤다. 이어 “케슬러가 1998년 인종차별로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맞으나 현재 그가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볼 근거는 없다”면서 게시물 내용의 사실 여부를 A씨가 입증할 수 없다는 점도 문제 삼았다.
스위스에서는 이번 판결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지방법원 판결이긴 하지만 스위스 사회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한 변호사는 “페이스북 '좋아요'를 눌렀다는 이유로 기소하기 시작하면 표현의 자유가 침해될 수 있다”면서 판결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SNS 상 명예훼손죄 성립 요건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SNS는 공유, 공감을 표현하는 다양한 기능이 있어 각각에 대한 세부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이어졌다. 미국 연방법원은 2013년 “페이스북 '좋아요'도 수정헌법 제1조가 보호하는 ‘발언’(speech)에 포함된다”고 판결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관련 판례가 없다.
이재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