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피플피디아] 연합군 34만명 살린 히틀러의 오판… 됭케르크 철수작전

입력 2017-05-30 05:00 수정 2017-05-30 10:33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신작 ‘됭케르크’에서 주연을 맡은 신인배우 피온 화이트헤드. AP뉴시스

됭케르크 철수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34만명에 달하는 연합군 병사들을 불과 9일 만에 바닷길로 구출한 대규모 작전이었다. 다이나모 작전으로도 불린다. 문헌으로 남은 전쟁사에서 최대 규모의 철수였다. 또 민간인이 적진 앞까지 침투해 군인을 구한 작전이기도 했다. 전쟁 초반 나치 독일군에게 연일 격퇴당해 절망에 빠졌던 유럽 연합군은 이 작전을 계기로 전의를 끌어올려 반격할 수 있었다. 오는 7월 21일 개봉하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신작 ‘됭케르크’(한글 제목 덩케르크·영문 제목 Dunkirk)는 이 작전을 재조명한 영화다.

1. 됭케르크는 어떤 도시인가

됭케르크(Dunkerque)는 프랑스 북부 해안도시다. 네덜란드 서플라망어에서 모래 언덕을 뜻하는 ‘됭(dune)’과 교회라는 의미의 ‘케르크(kerke)’를 합성한 명칭. ‘사구의 교회’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벨기에 국경과 가깝고, 영국과 도버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했다. 철도와 운하망이 모이는 인구 7만명의 항구도시로, 프랑스 북부의 무역을 책임지고 있다.

이런 지리적 특성은 됭케르크를 유럽 열강의 전쟁터로 만들었다. 14~16세기 부르고뉴 오스트리아 스페인은 차례로 이곳을 영유했다. 1658년 프랑스령으로 복속됐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점령하지 못한 됭케르크를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함락했다. 전쟁사에 영원히 기록될 됭케르크 철수작전은 나치 독일군에 점령되는 과정에서 전개됐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반인 1944년 9월 됭케르크를 포위해 이듬해 5월 수복했다.

지도에서 파란색 화살표 표시 지점이 됭케르크. 구글 지도

2. 연합군은 됭케르크에서 어떻게 탈출했나

됭케르크는 1940년 여름 전운에 휩싸였다. 나치 독일군은 그해 5월 전선을 서부로 옮겨 진격했고,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 연합군은 패퇴를 반복했다. 그렇게 됭케르크까지 퇴각했다. 육상의 퇴로나 보급로가 없는 이곳에서 연합군 병사들은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사기도 바닥까지 떨어졌다. 하인츠 구데리안 사령관의 나치 독일군 기갑부대는 됭케르크를 포위해 연합군 병사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연합군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죽음의 항전, 또는 도버해협을 통한 철군이었다.

선택은 철군이었다. 이 작전의 지휘관은 영국 해군 중장 베트람 렘세이였다. 렘세이는 그해 5월 27일부터 군용 선박은 물론 어선 화물선 유람선 구명정 등 왕실과 민간의 대·소형 선박을 모두 동원해 됭케르크의 연합군 병사들을 이송하는 작전을 전개했다. 작전 첫 날 1만명도 안 됐던 구출인원은 이틀 뒤부터 하루 5만명 안팎까지 늘었다. 그렇게 같은 해 6월 4일까지 860척의 선박이 연합군 병사 33만8226명을 구출했다. 됭케르크 남겨져 나치 독일군에 붙잡힌 연합군 포로 역시 많았다. 퇴각하면서 버린 무기들이 나치 독일군에 넘어간 점은 작지 않은 손실이었다. 하지만 이 작전은 연합군의 항전의지를 높였고, 그 결과 반격할 힘으로 작용했다.

배우들이 2016년 5월 26일 프랑스 됭케르크에서 영화 ‘됭케르크’의 한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AP뉴시스

3. 여전히 의문 남긴 히틀러의 진격중지 명령

됭케르크 철수작전의 성공 요인은 영국 해군의 탁월한 작전수행 능력, 영국 국민의 애국심 등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작전을 일주일 앞둔 같은 해 5월 20일 기갑부대를 24시간 동안 멈춰 세운 당시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의 이해할 수 없는 지시 역시 중요한 요인이었다. 히틀러가 서부전선에서 연전연승하던 기갑부대를 단 하루 멈추면서 연합군은 더 많은 병력을 구출할 수 있었다. 영국 해군의 철수작전 수행을 사흘 앞둔 같은 달 24일 나치 독일군은 됭케르크 앞 15㎞까지 진격한 상태였다. 히틀러의 이런 오판은 지금까지 의문을 남기고 있다.

3-1. 전략적 판단설: 독일은 앞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여러 교전 교훈을 얻었다. 그 중 하나가 1914년 마른전투였다. 독일군은 영국·프랑스군에 반격을 허용했고, 그 결과 전쟁의 판세를 연합군에 빼앗겼다. 수로와 습지가 많은 됭케르크에서 기갑부대의 진격이 쉽지 않은 점 역시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얻은 교훈이었다. 히틀러가 병사들에게 휴식을 부여하고 무기와 식량을 보급해 전열을 가다듬을 목적으로 기갑부대 진격중지를 지시했다는 주장은 가장 설득력을 얻는 가설이다.

1931년 12월 5일 독일 뮌헨 나치 당사를 방문한 아돌프 히틀러. AP뉴시스

3-2. 내부정치설: 나치 독일 남부집단군 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는 전차와 보병 사이에서 크게 벌어진 행군 간격을 우려했다. 기갑부대에 진격 속도를 늦추라고 끊임없이 요구해 육군 총사령부와 대립했다. 이로 인해 룬트슈테트가 지휘권을 상실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 가설은 히틀러가 평소 전략을 공감한 룬트슈테트의 손을 들어주면서 최고 사령관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전군에 각인할 목적으로 기갑부대의 진격을 가로막았다는 의견이다.

3-3. 올리브가지설: ‘올리브가지’설은 히틀러가 평화협상, 또는 종전 이후를 대비해 됭케르크 철수작전을 방관했다는 가설이다. 올리브 나무가지는 유럽에서 평화를 상징한다. 히틀러가 영국 수상이던 윈스턴 처칠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경우 ‘자애로운 히틀러’라는 이미지를 부각해 조금 더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하길 원했다는 추측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온 여러 음모론 중 하나다.

국민일보 더피플피디아: 됭케르크 철수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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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오 박세원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