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작곡가 라벨(1875~1937)의 ‘볼레로’는 러시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과 함께 안무가들의 안무 욕구를 자극하는 양대 작품으로 꼽힌다. 그리고 그동안 수많은 안무가들이 두 음악으로 작품을 만들었지만 걸작이란 평가를 받은 경우는 드물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봄의 제전’보다 더 자주 무용 공연에 이용되는 ‘볼레로’는 라벨이 발레 뤼스 출신 스타 무용수 이다 루빈스타인(1883~1960)을 위해 작곡했다. 루빈스타인은 라벨에게 스페인풍 춤을 위한 곡을 써달라고 위촉했고, 그는 1928년 10월 15분 분량의 곡을 완성했다. 반복되는 하나의 반주 리듬과 반주 화음 그리고 두 개의 주제 가락에 많은 악기들이 점차적으로 참여하면서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독특한 관현악곡이다.
곡이 완성되고 한달 뒤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같은 제목의 무용 작품이 초연됐다. 스페인 술집의 탁자 위에서 홀로 춤추는 여성 무용수를 보고 있던 손님들이 금세 동화돼 다같이 춤춘다는 내용이다. 여성 안무가 니진스카가 안무한 이 작품은 평단과 대중 모두로부터 호평을 얻었다.
‘볼레로’는 원래 춤을 위한 곡으로 쓰여졌지만 음악 자체로 걸작의 반열에 올랐다. 그래서 초연 직후부터 여러 오케스트라의 연주 레퍼토리로 자리잡았다. 반면 춤은 루빈스타인이 1935년 무용단 문을 닫으면서 한동안 무대에서 볼 수 없게 됐다.
‘볼레로’가 다시 춤으로 세간의 주목을 끈 것은 루빈스타인이 세상을 뜬 이듬해인 1961년이다. 바로 그 유명한 프랑스 안무가 모리스 베자르가 안무한 ‘볼레로’다. 이 작품은 프랑스 영화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에도 등장하는가 하면 몇 차례 모리스 베자르 발레단(정식명칭은 20세기 발레단을 거쳐 베자르 발레단 로잔) 내한공연으로도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다. 베자르의 ‘볼레로’는 무대 한가운데 원형 테이블에서 무용수가 춤추는 것으로 시작하는 니진스카 안무의 모티브를 일부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무대, 의상, 동작 등 스페인 정서가 물씬 풍기는 니진스카 버전과 달리 현대적이면서 감각적이다. 검은 타이즈와 살색 상의(또는 노출), 감각적인 조명, 유혹적인 움직임 등이 한데 어울어지면서 에로틱하면서도 광기어린 분위기를 자아낸다.
초연에선 유고슬라비아 출신으로 20세기 발레단 단원인 듀스카 시프니오스가 테이블 위에 오르는 주역을 맡았다. 지금이야 여러 발레단이 베자르의 ‘볼레로’를 레퍼토리로 가지고 있지만 20세기 발레단에서만 공연할 땐 베자르의 연인이었던 조르주 돈을 비롯해 마야 플리세츠카야, 실비 기엠, 수잔 패럴 등 세계적인 무용수들이 거쳐가는 것으로 유명했다.
베자르 이후 여러 안무가들이 앞다퉈 볼레로를 안무했다. 1991년 볼레로를 세 가지 버전으로 해석한 프랑스 안무가 오딜 뒤복의 ‘3개의 볼레로’, 1997년 남녀 파드되로 만든 롤랑 프티의 ‘볼레로’처럼 잘 알려진 것 외에도 수많은 버전의 ‘볼레로’가 나왔다.
우리나라에선 1980년대 이후 조승미, 제임스전 등 몇몇 안무가가 ‘볼레로’를 선보였다. 최근에도 국립발레단의 이영철, 툇마루무용단의 이동하 등 젊은 안무가들이 ‘볼레로’를 가지고 작품을 만들었다.
하지만 국내 무용계에서 ‘볼레로’는 안성수 국립현대무용단장을 빼고는 이야기 할 수 없다. 안 단장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1997년 ‘8일간의 여행’을 시작으로 볼레로 연작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다시 만난 볼레로’ ‘욕망의 방’ ‘Life 볼레로 2005’ ‘볼레로 2006-귀신이야기’ ‘볼레로-대륙김씨의 부활’ ‘메이팅 댄스’ 등 무려 11개 버전을 내놓았다. 이가운데 2005년 ‘볼레로’를 가지고는 한국 안무가 최초로 ‘무용계의 아카데미상’ 브누아 드 라당스 안무부문 후보에 올랐다.
따라서 안 단장이 국립현대무용단 부임 후 첫 신작으로 후배 스타 안무가 3명의 작품으로 이뤄진 ‘쓰리 볼레로’(6월 2~4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를 선보이는 것은 흥미롭다.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와 파리오페라발레 솔리스트를 거쳐 현재 국내 발레계를 대표하는 안무가로 활동중인 김용걸, 벨기에의 대표적 현대무용단 피핑톰 컴퍼니를 거쳐 ‘댄싱9 시즌2’에서 우승하며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김설진, 안 단장이 이끌던 무용단 픽업그룹 출신으로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 예술감독으로서 맹활약하고 있는 김보람이 신작의 주인공들이다.
안 단장은 “지난해 12월 초 국립현대무용단 단장 취임한 후 한달만에 2017년 프로그래밍을 마쳐야만 했다. 마침 11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김용걸 교수가 학생들과 선보인 ‘볼레로’를 매우 인상깊게 봤던 터라 다른 안무가들과 함께 각각의 ‘볼레로’를 만들게 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내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현대무용도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해왔다. 세 안무가들은 대중적 지지가 높은데다 각각의 작품들 역시 재밌어서 관객들이 어려운 현대무용이란 선입견 없이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