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잃은 김동연 부총리 후보자가 세월호 참사 당시 쓴 글

입력 2017-05-22 00:01 수정 2017-05-22 00:01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 내정된 김동연 아주대 총장. 뉴시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가 3년 전 세월호 사고 직후 한 일간지에 쓴 칼럼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21일 김 후보자를 지명하자 SNS를 통해 당시 칼럼이 빠르게 퍼졌다. 네티즌들은 “아픔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위로를 할 수 있다” “유가족이 세월호 유가족을 위로한 펼침막이 떠오른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김 후보자는 2014년 중앙선데이에 [김동연의 시대공감]을 연재했다. 그는 2014년 5월 4일자 ‘혜화역 3번 출구’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병을 얻어 갑자기 세상을 떠난 큰아들을 떠올리며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김 후보자는 칼럼에서 ‘자신의 아들이 2년여 투병 끝에 반년 전 스물여덟 나이로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났다’고 밝혔다. 그는 박근혜정부 국무조정실장으로 일할 때 백혈병으로 장남을 잃었다. 장남의 발인 당일 오후 출근했다는 일화가 뒤늦게 알려지기도 했다.

그는 “대학로 소극장으로 연극을 보러 가던 길목인 혜화역에 큰애가 서울대병원에 입원하면서 전과 전혀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2년 반 전 알게 됐고, 그 길은 가슴 찟는 고통을 안고 걷는 길이 돼 버렸다”면서 “세월호 사고로 자녀의 구조를 애타게 기다리는 부모의 모습을 TV로 보면서 남 몰래 눈물을 닦았다. 떠난 자식에 대한 애절한 마음과 간절한 그리움을 누가 알까. 자식을 잃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알 수 없는 고통일 것이다”고 적었다.

김 후보자는 “어른이라 미안하고, 공직자라 더 죄스럽다”고 했다. 그는 “2년여 투병을 하다 떠난 큰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한데, 한순간 사고로 자식을 보낸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 생각하니 더 아프다. 사고 수습 과정에서 그분들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려고 노력했는지, 그분들 입장에서 더 필요한 것을 헤아려는 봤는지 반성하게 된다”고 썼다.

그는 그러면서 “돌아보고 고쳐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서로를 위로하고 보듬어 주는 치유공동체를 만들면 좋겠다. 그리고 희생된 분들을 오래 기리고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진정한 사회적 자본이고, 희생된 꽃 같은 젊은이들에게 우리가 진 빚을 갚는 길이다”고 했다.

김 후보자는 유가족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위로를 드리고 싶다’고 했다. 그는 “아무 말 않고 그저 따뜻한 허그(hug)를 해드리고 싶다. 그분들에게 닥친 엄청난 아픔의 아주 작은 조각이나마 함께 나누고 싶다는 마음을, 그분들의 힘든 두 어깨를 감싸며 전하고 싶다”며 절절한 마음을 전했다.


김동연 후보자는 문재인 정부의 경제 정책인 ‘J노믹스’를 실현할 선봉장에 지명됐다. 그는 관가에서 상고 출신의 입지전적 인물로 꼽힌다.

충북 음성 출신인 그는 열한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청계천 일대 무허가 판자촌에서 생활할 정도로 가세가 기울었다. 덕수상고를 졸업한 열일곱 살 때인 1975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한국신탁은행에 입행해 가족의 생계와 동생의 학비를 책임졌다.

1982년 입법고시 6회와 행정고시 26회에 합격해 1983년부터 경제기획원에서 공직을 시작했다. 서울대 행정학 석사, 미국 미시간대 정책학 박사를 받았다. 기획예산처 재정전략실 전략기획관, 산업재정기획단장, 재정전략실 재정정책기획관을 거쳤고 대통령실 경제금융비서관, 국정과제비서관, 기재부 예산실장, 기재부 2차관, 국무조정실장 등을 역임했다.

문 대통령은 김 후보자를 지명하면서 “저성장 민생경제의 위기 속에서 김 총장이 종합적인 위기관리 능력과 과감한 추진력을 갖췄다”면서 “청계천 판잣집 소년가장에서 출발해 국무조정실장까지 역임한 분으로서 누구보다 서민들의 어려움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인선배경을 밝혔다.


<다음은 [김동연의 시대공감] '혜화역 3번 출구' 전문>

혜화역 2번 출구는 늘 설레는 마음으로 걸었던 길이다. 꽤나 좋아하는 일 중 하나인 대학로 소극장에서의 뮤지컬이나 연극을 보러가는 길목이어서였다. ‘지하철 1호선’이나 ‘라이어’ 시리즈 무대도 이 길을 따라 찾곤 했다.

같은 혜화역에 전혀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2년 반 전, 갑자기 힘든 병을 얻은 큰애가 서울대병원에 입원하면서부터였다. 병원 가는 길인 혜화역 3번 출구는 가슴 찢는 고통을 안고 걷는 길이 돼 버렸다. 서로 마주 보는 두 길이 이렇게 다를 수 있나 탄식이 나오곤 했다.

가끔 했던 강연에서 젊은이들을 꽃에 비유하곤 했는데 정말 꽃 같은 학생들이 세월호 사고로 희생됐다. 구조를 애타게 기다리는 부모의 모습을 TV로 보면서 남 몰래 눈물을 닦았다. 아내는 너무 울어 눈이 퉁퉁 부을 정도였다. 떠난 자식에 대한 애절한 마음과 간절한 그리움을 누가 알까. 자식을 잃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알 수 없는 고통일 것이다.

죽을 것 같은 그리움도 세월 앞에는 먹빛처럼 희미해지기 마련이지만, 아주 드물게는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다. 반년 전 스물여덟 나이로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버린 큰애는 지금도 씩 웃으며 어디선가 불쑥 나타날 것 같아 주위를 둘러보곤 한다. 어린이날을 생일로 둬서 이맘때는 더욱 그렇다.

옆에서 많이들 그런다. 시간이 지나야 해결될 것이라고. 일에 몰두해 잊어보라고. 고마운 위로의 말이긴 하지만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자식 대신 나를 가게 해달라고 울부짖어 보지 않은 사람, 자식 따라 나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아픔이란 것을.

떠나보낸 뒤에도 그 아픔을 매일 ‘똑같이’ 느끼는 것이 힘들었다. 아픔을 잘 견디고 있는 ‘척’을 해야 할 때는 더욱 그랬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생각의 서랍장’을 만들려 해봤다. 그 장(欌)의 칸을 막아 그리움, 사랑, 분노, 안타까움, 미안함, 애틋함과 같은 감정의 끝단이 들어갈 서랍을 따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 아파 견디기 힘들 때 그 일부를 잘라 서랍에 보관해 두는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애절함의 더욱 절실한 표현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해결이 안 되는 아픔은 언젠가 서랍에 꼭꼭 넣어 두었던 감정의 모서리까지 모두 꺼내 훌훌 털어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훗날 그리운 사람을 다시 만나는 소망이 이루어졌을 때다. 그런 해원(解寃)이 있을 때야 서로 부르는 소리가 비껴가지 않을 것이다.

서랍장을 만드는 데 힘이 된 것은 주위의 위로였다. 큰애를 보낼 때 얼굴을 무너뜨리고 눈물을 흘렸던 반백의 중년은 큰애 돌 잔치 때 왔던 40년 넘은 친구였다. 어린애처럼 엉엉 울던 덩치가 산(山)만 한 청년은 외국에서 일부러 귀국한 큰애의 친구였다. 노구(老軀)를 지팡이에 의지해 운구차를 지켜보던 분은 큰애가 대학원 갈 때 추천서를 써주셨던 여든이 넘은 옛 상사였다.

이번 사고로 많이 아프다. 어른이라 미안하고 공직자라 더 죄스럽다. 2년여 투병을 하다 떠난 큰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한데, 한순간 사고로 자식을 보낸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 생각하니 더 아프다. 사고 수습 과정에서 그분들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려고 노력했는지, 그분들 입장에서 더 필요한 것을 헤아려는 봤는지 반성하게 된다.

돌아보고 고쳐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그래도 우리처럼 모든 국민이 함께 아파하는 나라는 그리 흔치 않다. 여기서 더 나아가 서로를 위로하고 보듬어 주는 치유공동체를 만들면 좋겠다. 그리고 희생된 분들을 오래 기리고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진정한 사회적 자본이고, 희생된 꽃 같은 젊은이들에게 우리가 진 빚을 갚는 길이다.

혜화역 3번 출구에는 아직도 다시 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가족 중에 누군가 아파야 한다면 엄마, 아빠나 동생이 아니라 자기인 것이 다행’이라고 했던 큰애 때문이다.

이번 희생자 가족들도 견디기 어려운 사연들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분들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위로를 드리고 싶다. 그렇게 할 어떤 방법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아무 말 않고 그저 따뜻한 허그(hug)를 해드리고 싶다. 그분들에게 닥친 엄청난 아픔의 아주 작은 조각이나마 함께 나누고 싶다는 마음을, 그분들의 힘든 두 어깨를 감싸며 전하고 싶다.

정지용 기자 jyje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