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2015년 지인들에게 “고래도 얕은 물에 갇히니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민주당 대표를 맡고 있을 때였다. ‘친문(친문재인) 패권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당 안팎에서 한층 높아져 있었다. 연쇄 탈당 움직임도 점차 구체화돼 갔다.
"고래도 얕은 물에 갇히니…"는 자신의 상황을 빗댄 말이었다. ‘개혁과 쇄신'(고래)을 하고 싶은데, ‘얕은 물'(패권주의 프레임)에 갇히니 운신의 폭이 좁다는 하소연이다. 당시 당내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측근은 “패권주의라는 프레임이 일단 형성돼버리니 문 대통령은 사실무근이란 해명을 비롯해 어떤 말도 하기 힘든 입장에 놓였다"고 했다.
노무현정부 출신의 한 인사도 “문 대통령은 친노·친문 패권, 3철(전해철 양정철 이호철) 세력 같은 비판을 오랜 기간 들어온 사람”이라며 “국민들이 그런 비판을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상황을 무척 답답해했다”고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정권을 쥐고 흔든다"는 '친노 세력' 프레임 속에서 임기 내내 시달렸다.
◇ '친문 패권' 프레임 걷어내는 인선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0일 취임 이후 단행한 일련의 '인사'는 오랫동안 고심해온 "프레임 탈출작전"을 실행에 옮긴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친문' 프레임, '패권주의' 프레임을 벗어던지지 못하면 국민 통합에 기반한 국정 동력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측근 2선 후퇴'를 결단하고, '참여정부 출신자 기용'의 엄격한 원칙을 세웠다는 것이다.
조국 민정수석 등 일부 청와대 수석 및 비서관 인선이 이뤄질 때 총무비서관에는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이 거론됐다고 한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이를 택하지 않았다. 대신 공무원인 이정도 기획재정부 행정안전예산심의관이 낙점됐다. 민주당 선대위에서 활동했던 한 인사는 15일 “양 전 비서관이 총무비서관에 임명되지 않는 것을 보고 우리도 놀랐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 측근 인사들은 이를 “측근정치라는 비판에 대한 문 대통령의 결벽증에 가까운 거부감”이라고 표현했다. ‘친문 패권주의’ 프레임을 벗어내려면 '측근'이란 말부터 지워야 한다는 게 문 대통령 생각이란 뜻이다. 여권 관계자는 “비판이 뻔히 예상되는 상황에서 측근들을 청와대와 내각에 쓰기 힘들지 않았을까 한다”고 했다.
◇ 양정철 보내며 눈시울 붉힌 문 대통령
문 대통령에게 이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문 대통령은 15일 저녁 양정철 전 비서관과 만찬을 했다. 임종석 비서실장, 김경수 민주당 의원 등 극소수만 참석했다. 양 전 비서관은 만찬을 끝내고 언론에 '2선 후퇴'를 알리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문 대통령은 양 전 비서관의 2선 후퇴 의지를 듣고, 착잡함과 아쉬움에 눈시울을 적신 것으로 알려졌다.
문 대통령도 양 전 비서관을 지근거리에 두고 싶어 했다고 한다. 하지만 패권주의 프레임에 갇힐 수 있다는 부담감이 컸고, 이를 아는 양 전 비서관의 2선 후퇴 의지가 너무 강해 결국 받아들였다. 양 전 비서관은 네덜란드로 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다른 친문 인사인 최재성 전 의원도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지금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사람이 있고, 무엇인가를 계획해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후자”라며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권력을 만들 때 어울리는 사람”이라면서 2선 후퇴 의사를 피력했다. 그는 “대통령께도 선거에서 이기는 일 외에는 제 거취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이미 말씀드렸다"고 덧붙였다.
◇ '프레임 탈출' 거들고 나선 측근들
대선 '재수'를 한 문 대통령은 당은 물론 원외에도 자문 그룹이 적지 않다. 이들은 대부분 예비후보 캠프와 당 선대위 구성 과정에서 중책을 맡았다. 하지만 대선 이후 주요 인선에서 사라지고 있다. 서훈 당 선대위 안보상황단장은 국가정보원장으로 내정된 뒤 주변에서 “막차를 타게 됐으니 잘하라”는 격려를 들었다고 한다. 서훈 단장 발탁을 '막차'로 여겼던 것이다.
이는 그만큼 측근들이 문 대통령의 '프레임 탈출'을 적극 거들었다는 뜻이 된다. 양정철 전 비서관은 세 차례나 문 대통령에게 2선 후퇴 의사를 표했고, 김수현 청와대 사회수석도 임명 직전까지 2선 후퇴 의사를 드러냈다고 한다.
측근들의 2선 후퇴는 탕평·통합 인사를 주도하는 임종석 비서실장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주고 있다. 문 대통령이 상대적으로 측근 이미지가 덜한 51세 젊은 비서실장을 발탁했고, 임 실장은 임명 후 각 수석 및 언론과 활발하게 소통하고 있다.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