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진 단장의 도박은 성공했다. 신예 강효형(29)이 안무한 국립발레단 신작 ‘허난설헌-수월경화’(5~7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가 기대 이상의 완성도를 보여줬다.
‘허난설헌-수월경화’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조선시대 여성 시인 허난설헌(1563~1589)을 소재로 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누나인 허난설헌은 어릴 때부터 시에 천재성을 보였다. 그러나 여성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시대 속에서 자신을 이해못하는 남편, 친정의 몰락, 자식들의 이른 죽음에 슬퍼하다 27살에 요절했다.
이 작품은 허난설헌의 삶을 드라마로 풀어내는 대신 이미지로 형상화한 모던발레다. 부제 ‘수월경화(水月鏡花)’가 물에 비친 달, 거울에 비친 꽃이란 뜻으로 볼 수는 있어도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것을 비유한다는 점에서 강효형의 안무 의도와 일맥상통한다.
강효형은 허난설헌의 시들 가운데 ‘감우(感遇)’와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을 모티브로 55분짜리 작품을 풀어냈다. 전반부는 느낀대로 노래한다는 뜻의 ‘감우’를 통해 허난설헌의 따뜻하고 행복한 시절을, 후반부는 꿈 속 광상산에서 노닐다는 뜻의 ‘몽유광상산’을 통해 고통스럽고 슬픈 말년을 표현했다.
무대 뒤에 펼쳐져 다양하게 활용되는 병풍은 이 작품이 허난설헌의 시 속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다. 수석무용수 박슬기가 맡은 허난설헌은 시 속 화자로 무대에 등장한다. 무용수들의 춤은 허난설헌의 붓글씨를 연상케 했다가 시구에 나오는 난초가 피고지는 모습을 형상화하기도 한다. 또 새, 바람, 바다, 부용꽃 등 시 속 사물들의 이미지가 춤으로 표현된다.
구체적인 줄거리 없이 추상적인 표현으로 이어지는데도 이 작품이 지루하지 않은 것은 음악의 힘이 크다.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춘설’ ‘침향무’ ‘하마단’을 비롯해 김준영의 거문고, 한진·심영섭의 가야금 등 12곡이 강효형의 안무와 매우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강효형은 이번 작품을 만드는 동안 음악 선곡에 가장 신경을 썼다고 밝힌 바 있는데, 새로 곡을 쓰는 것이 수월할 수 있지만 완성도 높은 기존 음악을 잘 활용하면 작품에 더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또 음악 외에 강효형의 안무를 한층 날렵하고 세련되게 보여준 요소로 무대세트, 영상·조명, 의상 등 스태프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아쉬운 점도 있었다. 창작 초연인데다 강효형의 안무가 까다롭다보니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매끄럽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일부 무용수는 스텝이 꼬여 박자를 놓치기도 했다. 또 강효형의 안무에서 강렬한 군무에 비해 허난설헌 역의 솔로는 다소 임팩트가 약했다. 전반부와 후반부에서 허난설헌의 대비가 좀더 두드러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여성 안무가가 여성 시인을 표현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여성 무용수 중심으로 전개됐지만 남성 무용수들의 역할이 여성 무용수를 지탱하거나 들어올리는데 머무르는 것도 안타깝다.
여러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국립발레단은 2015년부터 강수진 단장이 친정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을 벤치마킹해 시작한 안무가 육성 프로젝트 ‘KNB 무브먼트’의 성과를 입증하는데 성공했다. 지난 2년간 KNB 무브먼트를 통해 국악에 전통춤의 몸짓과 호흡법을 가미한 ‘요동치다’와 ‘빛을 가르다’를 잇따라 선보여 큰 주목을 받았던 강효형은 이번에 전막발레마저 성공시켰다.
사실 15분 안팎의 소품 2개를 만든게 전부인 강효형에게 전막 발레를 맡긴 것은 강 단장으로선 ‘도박에 가까운 모험’이었다. 하지만 강효형은 이번에 우려를 씻어낸 것은 물론이고 안무가가 귀한 한국 발레계에서 미래가 기대되는 재목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무엇보다 음악에 대한 강효형의 예민한 감각은 그가 좋은 안무가가 될 수 있는 필수자질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앞서 ‘요동치다’와 ‘빛을 가르다’에서 그는 이미 뛰어난 선곡 능력을 보여준 바 있다. 여기에 아직 젊은 그는 과거 선배 안무가들이 전통에 대해 가졌던 강박관념도 없는데다 해외 발레계의 트렌드까지 꼼꼼하게 공부하고 있어서 자유롭고 세련된 안무 스타일을 구사할 줄 안다. 그의 다음 신작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