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클래식 실내악의 역사는 현악사중주단 노부스 콰르텟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2007년 결성된 노부스 콰르텟은 2012년 독일 ARD 콩쿠르 2위, 2014년 오스트리아 모차르트 콩쿠르 1위 등 여러 국제 콩쿠르에서 수상한 뒤 지금은 유럽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실내악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노부스 콰르텟이 세계 정상급 실내악팀으로 성장하기까지 2008년 손을 잡은 이샘(43) MOC 프로덕션 대표의 뒷받침 없이는 이야기할 수 없다.
2007년 설립된 MOC 프로덕션은 현재 노부스 콰르텟을 비롯해 지휘자 최수열, 현악사중주단 노부스 콰르텟, 피아니스트 선우예권, 바이올리니스트 김다미, 호르니스트 김홍박 등 클래식계 스타 연주자 22명이 소속된 매니지먼트사 겸 공연기획사다. 국내에서 연간 자체기획 10회, 소속 연주자들이 참가하는 공연 200~250회가 치러진다. 이 대표가 올해 MOC 프로덕션 설립 10주년을 맞아 오는 13일 서울 서초구 페리지홀에서 기념콘서트 ‘Thank You'를 개최한다. 콘서트에 맞춰 공연기획자로서 그동안의 경험을 담은 에세이 ‘너의 뒤에서 건네는 말’도 출간한다. 1일 이 대표를 만나 지난 소회를 들어봤다.
“공연 기획자는 무대의 주인공도 조연도 아닌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아티스트를 이해하고 그들이 자신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야만 해요. 말은 이렇게 해도 지난 10년을 돌이켜 보면 시행착오의 연속이었어요. 공연 기획자를 꿈꾸는 후배들은 시행착오를 덜 겪기를 마음에서 책을 쓰게 됐습니다.”
승무원 출신인 그는 30살의 다소 늦은 나이에 공연계에 입문했다. ‘한국의 메디치’로 불린 고 박성용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시절 회사가 직원들에게 클래식 감상 기회를 자주 줬던 것이 그의 삶을 변화시켰다.
“1996년 승무원 훈련생 시절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금호현악사중주단 공연에 가게 됐어요. 당시 훈련생들은 회사 주최 공연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차출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저는 첫날 클래식에 완전히 매료됐어요.”
이후 승무원으로 일하면서 그는 틈이 날 때마다 클래식 공연을 보러다녔다. 점차 음악을 감상하는데서 나아가 음악 가까이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됐다. 그러다 2004년 국내 대표적 클래식 공연 기획사 크레디아에 입사하면서 기획자의 길을 걷게 됐다.
“당시 크레디아가 운영하던 호암아트홀의 하우스 매니저 공고를 보고 응모했습니다. 하우스 매니저가 기본적으로 승무원과 비슷한 서비스업이라고 생각해 용기를 냈어요. 공연장 서비스에 대한 논문을 써서 면접장에서 제출하는 등 최선을 다했죠. 솔직히 지금 생각하면 그 논문은 말도 안되지만 정재옥 대표님이 제 열정을 좋게 보고 뽑아주셨어요. 1년 정도 하우스매니저로 일한 뒤 정 대표님께서 공연기획을 해보라고 제안하셨어요. 제가 자신없어하자 직접 보도자료 작성, 홍보와 마케팅 노하우 등을 가르쳐 주셨어요. 정 대표님은 지금까지도 제게 멘토 같은 분입니다.”
3년간 크레디아에서 근무한 뒤 독립한 그는 첫 기획공연 ‘칸타빌레 콘서트’로 홈런을 날렸다. 이 콘서트는 괴짜 음대생들 소재의 일본 만화 겸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 속 음악회를 무대에 재현한 것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생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프로젝트 형태의 S오케스트라와 예종 전문사 과정을 밟고 있는 지휘자 최수열(치아키 역), 피아니스트 이효주(노다메 역)가 출연했다. 젊은 층에 높은 인기를 끈 이 콘서트는 이후 2년 더 무대에 올랐다.
“칸타빌레 콘서트가 경제적 이익을 남겨주기도 했지만 당시 오케스트라에 참가했던 한예종 학생 100명의 인맥은 공연기획자로서 큰 자산이 됐습니다. 특히 최수열 씨가 지휘자로 합류한 덕분에 좋은 연주자들이 많이 참가했어요. 현재 MOC 프로덕션 소속 아티스트들의 대부분이 그때의 인연에서 비롯된 거에요. 예를 들어 오케스트라에 참가한 첼리스트 문웅휘를 통해 노부스 콰르텟을 알게 됐어요. 또 이효주를 통해 나중에 트리오 제이드와 인연을 맺게 됐죠.”
노부스 콰르텟은 MOC 프로덕션의 출발점이자 정체성을 보여주는 간판 아티스트다. 노부스 콰르텟이 성공한 덕분에 또다른 아티스트들이 잇따라 MOC 프로덕션과 손을 잡게 됐다. MOC 프로덕션은 최근 자체 기획 공연 10회, 소속 아티스트 출연 공연 200~250회 정도를 소화할 만큼 바쁘게 돌아간다.
“2008년 노부스 콰르텟을 처음 만났을 때 바이올리니스트 김재영을 중심으로 만들어진지 1년밖에 안된 상태였어요. 하지만 이들의 음악을 듣는 순간 가능성을 확신했고, 서로 진솔한 대화를 나눈 끝에 계약을 맺었죠. 하지만 초반에는 수익이 없어서 MOC 프로덕션은 파산 직전까지 갔었어요. 당시엔 언제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도 많이 했죠. 그러다가 전환점이 된 것은 노부스 콰르텟이 ARD 콩쿠르에서 2위에 오르면서부터에요. 한국에서 개최한 콘서트에 관객이 차기 시작했고, 유럽에선 공연 기회가 부쩍 늘었죠. 그리고 모차르트 콩쿠르 1위에 오른 뒤 세계 최고 수준의 현악사중주단을 대거 보유한 매니지먼트사 짐멘아우어와 계약하게 됐어요. MOC 프로덕션의 경우 국내에서는 소속 아티스트들에게 좋은 공연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해외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만큼 그곳의 좋은 매니지먼트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노부스 콰르텟을 시작으로 그는 한국에서 ‘실내악의 대중화’를 이끈 주역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MOC 프로덕션 안에는 트리오 제이드, 아벨 콰르텟, 뷔에르 앙상블 등 실내악팀이 넷이나 될 뿐만 아니라 실내악을 좋아하는 솔리스트들이 많다. 대형 오케스트라 아니면 스타 솔리스트 공연이 주류를 이루던 한국에서 그가 실내악에 대해 강력한 의지를 가지게 된 것은 왜일까.
“제 취향이 마이너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처음 클래식을 들을 때부터 실내악에 끌렸어요. 천국의 비밀이 열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걸 세상 사람들에게 더 알리고 싶었어요. 솔직히 노부스 콰르텟과 계약할 때 주변에서 다들 말렸습니다. 우리나라에 실내악 시장이 없기 때문에 ‘밑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거라고요. 하지만 저는 훌륭한 전문 실내악팀이 등장하면 한국 관객들도 바뀔 거라고 믿었어요.”
그는 소속 아티스트들을 동생처럼 여긴다. 실제로 아티스트들은 그를 ‘누나’라고 부른다. 티격태격하지만 서로에 대한 강한 믿음이 MOC 프로덕션을 지금의 위치로 끌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까지 아티스트가 한 명도 나간 적이 없다는 것이 그에겐 큰 자부심이다. 다만 아티스트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부담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고 반성한다.
“아티스트가 새로 들어오는 것은 또다른 우주가 열리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가족처럼 쭉 함께 할 수 있는 아티스트라는 확신이 있을 때만 계약을 합니다. 제가 회사를 10년간 끌고 왔지만 사실 아티스트들 덕분입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아티스트들에게 실수도 많이 했어요. 혹시라도 아티스트가 작은 실수라도 해서 재능이 묻힐까봐 전전긍긍하면서 부담을 줬습니다. 집착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매니저는 코치가 아닌데, 간혹 선을 넘어서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제는 그런 시행착오 끝에 균형감을 좀 찾은 것 같아요.”
MOC 프로덕션은 올해 처음으로 해외 아티스트 초청 공연도 추진한다. 연말 짐멘아우어 소속으로 세계적인 현악사중주단인 벨치아 콰르텟의 첫 내한공연을 가질 예정이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