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낮. 전남 순천매산중학교 담장을 따라 순천시기독교역사박물관을 향하던 길이었다. 학교 정문을 마주보고 오른쪽길 담장이 기와를 얹은 토담장이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자 학교 ‘수위 아저씨’가 학교 구경을 하라고 권했다. 선교사들이 세운 아름다운 건물이 있다고 했다.
‘호남기독학원’ ‘순천매산중학교’ 동판이 교문 기둥에 박혀 있다. 교문 왼쪽으로 ‘세월호 참사 3주년-세월호에 잠든 어린 영혼의 아픔을 함께 합니다’고 쓰여진 노란 현수막이 쿵 가슴에 와 닿는다. 교직원과 학부모회, 학생회가 내걸었다. 교문 안에 들어서자 교실 건물 창문 아래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라는 흘림 궁체가 인상적이다. 교문 안 정원 돌비엔 ‘세상의 빛이 되라’고 새겨져 있다. 매산중과 매산여고, 매산고는 1910년대 초 미국남장로회 순천선교부가 세운 매산학교에서 시작됐다. 이 캠퍼스 타운은 미국 남장로회 순천선교부 타운이었다.
담장 따라 오르는 이 매산길을 순천 사람들은 “매산등에 오른다”라고 말한다. 옛날 순천읍성이 내려다보였기 때문에 ‘등성’의 등이 붙었다.
순천시 의료원로터리에서 순천시기독교역사박물관까지 이르는 1㎞ 매산길은 기독교역사투어의 보고(寶庫)다. 인천 개항장거리가 식민지거리였다면, 매산길 순천선교부거리는 민족교회가 뿌리 내리는 과정을 알려주는 생생한 기독교 교육현장이다. 비(非)크리스천에게도 근대 골목길투어가 될 정도로 잘 보존돼 있다.
1913년 무렵.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가 읍성 북문 밖 동산에 14.5㎞에 이르는 순천선교부 부지를 매입한다. 남장로회는 1890년대 중국 네비우스 선교사에 의해 제시된 한국 선교 구역 구분에 따라 호남과 호서지방 일부를 선교지로 삼았다. 전주선교부를 시작으로 군산 목포 광주에 이어 전남 동부를 관할하는 순천선교부를 열었던 것이다.
1910년 8월 10일 경술국치로 국권이 상실됐다. 앞서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조약(1876) 체결한 뒤 야금야금 조선의 상권 등을 잠식해 나갔다. 순천읍성 상권도 장악한 일인들이 본정통(지금의 중앙동 일원) 신시가지를 건설했다.
순천 복음화는 1907년 4월 남장로교 선교사 변요한(J. F. Preston)이 순천 향교 안 양사재에서 초기 교인을 돌보는 것으로 본격화된다. 현 순천중앙교회다. 하지만 이듬해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양사재에서 쫓겨나자 서문 밖에 초가를 매입, 기역자 교회를 시작했다. 순천시기독교역사박물관 꼭대기 층에 이 기역자 교회를 재현해 놨다.
그리고 순천선교부 부지 조성과 매산학교 설립 등이 본격화되면서 중앙교회도 조직교회로서 면모를 갖추게 됐다. 선교사들은 또 순천선교병원(1914), 알렉산더병원(1916)을 건립하고 전염병과 한센씨병 등으로 죽어가는 조선 민중을 구했다. 알렉산더병원은 1901년 전북 군산야소병원장으로 부임한 알렉산더가 부임 직후 부친상을 당해 미국으로 돌아가 기부한 돈으로 건립됐다. 1935년 4월 11일자 조선중앙일보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이 병원은 전남 동부와 경남 하동·남해지역에까지 사랑의 의술을 펼쳤다.
초기 복음의 역사는 교육과 의료 선교였다. 순천선교부 역시 그렇다. 순천시기독교역사박물관에 전시된 한 장의 사진은 참담했던 우리의 현실이 잘 드러나 있다. 무명옷을 입은 한 사내가 아내인 듯한 여자를 지게에 지고 신식 병원을 찾는 모습이다. 지게 발채 바닥에 솜이불을 대고 여자를 뉘였다. 여자의 맨발이 지게 밖으로 나와 있다.
기록에 따르면 1932년 알렉산더병원 일반 환자가 6030명, 무료 환자가 8820명이었다. 1934년에는 일반 9021명, 무료 1만1503명었다. 의료 선교사들의 헌신을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미션스쿨 매산학교는 일제의 황국신민 선서를 거부했다. 일본 천황이라는 우상에 고개를 숙일 순 없었다. 그러자 1916년 조선총독부가 성경교과 교육 문제로 탄압했다. 학교를 자진 폐교할 수밖에 없었다. 1921년 재개교한 매산 남‧여학교는 일제의 기독교교육 불허로 상당기간 비인가학교로 머물다 1937년 신사참배 강요에 따라 다시 폐교되고 만다. 매산학교는 해방 후인 1946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순천노회유지재단 명의로 세 번째 개교를 할 수 있었다.
매산등 선교기지가 조성되자 고라복(R. T.Coit), 서로득(M. L. Swineheart), 구례인(J. Curtis Crane), 보이열(E. T. Boyer), 두애란(Lavalette Dupuy) 등의 선교사들이 텐트선교에 나섰고 고흥 보성 여수 등 지역교회에 사숙을 운영토록 지원했다. 거쳐 간 선교사가 총 73명이었다.
이들은 한국인 교역자 및 의료인 양성에도 힘썼다. 고라복 선교사의 두 자녀는 이질에 걸려 숨지기도 했다. 조선 선교는 선교사에게만 아니라 그 가족 또한 ‘바로 내일 일’조차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전남 동부에 70여개 교회를 개척했던 구례인은 1941년 평양신학교 교수 시절 일경에 연금됐다가 탈출, 1946년 순천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들은 선교지 양들을 거두기 위해 생과 사를 넘나들었다.
지금 매산등은 선교사마을로 불린다. 순천선교부거리라는 표현이 적절할 듯 하다. 등록문화재 등 10여개의 기독교유적과 알렉산더병원 부속 격리병동터 등 7개의 기독교터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매산중학교 옆 담장. 이 아름다운 담장길은 1948년 10월 여순사건 당시 피비린내 나는 현장이기도 했다. 이 사건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 저지를 위한 군인봉기로 박정희 전 대통령도 당시 장교로 이 봉기에 가담했다. 고랑이던 이곳에서 진압군에 의해 26명이 집단 총살당했다. 진압군이 당산나무 아래 마을 주민을 모이게 한 다음 이들을 몰아 선교부(매산학교)쪽으로 이동시키다 담장길에서 사살한 것이다.
이튿날 보이열과 박기열 박승규 이재만 등이 나서 26명의 시신과 봉기군 1명의 시신을 선교부 밭에 묻었다. 당시 의사 정인대는 페니실린 병에 시신의 이름을 적어 넣어 수습했다고 전했다(‘여순사건 순천지역 피해실태조사 보고서’). 순천시기독교역사박물관 위 산자락에 여순사건가매장지가 있다.
이처럼 매산등은 고통 받고 울부짖는 백성들과 함께한 복음의 땅이다. 죽은 아기를 버리는 공동묘지(애기 장터)에 불과했던 땅이 이제 부활의 동산처럼 크리스천의 영적 여행지가 돼 가고 있다. 시민들은 ‘교육’ ‘의료’ ‘희생’ ‘순교’ ‘복음’ 등 마을이 안고 있는 역사성을 알고 있다. 술집이 적고 대신 카페와 문화공간이 모여들어 순례길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이유다.
담장길은 오롯하다. 매산길도 오롯하다. 빛과 영이 함께 하는 순례길이 이곳이다.
조지와츠기념관과 순천기독진료소
순천선교부 거리 초입에 위치한 조지와츠기념관은 변형 3층 건물로 이 중 2~3층이 미국 남장로회 한국선교역사전시실로 활용되고 있다. 등록문화재 127호이기도 하다.
이 기념관 1층은 순천기독진료소이다. 이 진료소는 100년 넘게 한국 사랑을 이어온 린튼 가의 상징이기도 하다. 윌리엄 린튼(1891~1960)은 21세에 한국 선교사로 들어와 호남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유진 벨(1868~1925)의 딸 샬레 벨(1899~1974)과 결혼했다. 그는 교육선교사로 한남대학을 세우는 등 48년간 한국을 위해 헌신했다.
부부의 아들 휴 린튼(1926~1984)은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해군장교로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다. 로이스 린튼(인애자)과 결혼했다. 휴는 전쟁 후 주로 순천에서 활동했으며 농촌선교 사업 중 교통사고로 별세했다. 휴의 자녀 스데반(한국명 인세반), 제임스(인야곱), 존(인요한)은 모두 한국 출생으로 4대째 선교사다. 이 중 인요한(58․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이사장)은 특별 귀화자로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도 했다.
순천기독진료소는 로이스가 1960년대 결핵환자를 돌보기 위해 세운 결핵전문 진료소다. 무의탁 환자를 수용하는 순천결핵요양원 등이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지금은 인요한 등이 북한결핵퇴치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야기가 있는 기독교 역사순례길
2016년 3월 전남도는 도내 기독교 유적의 역사성에 주목하고 순례길 개발에 나섰다. 기독교성지 책자를 발간하는가 하면, 크리스천언론인을 대상으로 순례길 개발 설명회도 개최했다. 기독교 관련 유적지의 관광자원화와 국내 성지순례의 활성화를 통한 도보 여행객 유치에 역점을 두었다.
이에따라 목포 개항장순례길, 순천선교부거리 순례길, 신안 영광 영암 순교지 순례길 등을 콘텐츠로 다듬었다. 한국레저경영연구소 최석호 소장(서울 묵동교회 부목사)이 참여해 길을 열었다.
전남도 정순주 관광문화체육국장은 25일 “종교자원을 활용한 관광객 유치를 위해 유적지의 주변 환경을 개선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최 소장은 “기독교 전래 130여년이 됨에 따라 사라져 가는 역사유적을 보존하는 한편 시민친화적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특히 전남도 기독교 유적은 어느 지역보다 스토리텔링의 요소가 풍부하다”고 말했다.
순천=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