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가 좌우하는 대선…무기력한 경제·복지 이슈, 왜?

입력 2017-04-27 08:45

19대 대통령 선거 후보들은 26일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성주 배치, 북핵 해법 논란 등으로 불거진 외교·안보 변수 관리에 총력을 기울였다.

주한미군과 국방부가 26일 새벽 기습적인 사드 배치에 나서면서 '안보'는 이번 대선에서 더 큰 무게를 갖게 됐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안보관을 둘러싸고 선거 초반부터 벌어져온 논쟁이 '사드 배치'라는 가장 미묘한 문제로까지 확대되고 말았다.

지난해 우리 경제를 강타한 조선·해운업의 몰락, '헬조선'이란 신조어를 낳은 청년실업과 양극화, 갈수록 커지는 복지 수요와 재원 문제, 4차 산업혁명이 몰고올 예고된 충격 등 경제·일자리·복지·미래 등의 이슈는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 "안보 변수 관리하라" 캠프마다 비상

문재인 후보는 국방·안보 분야 1000명의 지지 선언을 끌어내며 “민주당이 안보 최고당”이라고 주장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안보 위기 책임론을 제기하며 정권 실세였던 경쟁주자들을 비판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는 안보 이슈를 최대 쟁점으로 부각시키며 지지층 결집을 노렸다.

문 후보는 오전 국회에서 ‘천군만마 국방안보 1000인’ 지지 선언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전직 군 장성, 경찰, 국가정보원, 병장전우회, 민간 안보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국방안보특보단이다. 문 후보는 “안보를 제자리에 놓을 진짜 안보세력이 저 문재인과 민주당”이라며 “더 이상 색깔론, 가짜 안보는 통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문 후보 측은 주요 여론조사에서 문 후보가 경쟁자인 안 후보 등에 비해 안보 이슈에서 강점을 보이고 있다고 판단한다. 선거 막판까지 적극적인 안보 행보를 펴겠다는 구상도 하고 있다. 북한 도발을 가정한 대응 시나리오도 준비한 것으로 전해졌다.

안 후보는 문 후보와 보수 후보들을 함께 비판하고 나섰다. 춘천 명동거리 유세에서 “문재인, 홍준표, 유승민 후보는 전임 정권 실세였고, 집권당이나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분들”이라며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기가 커지고 안보 위기, 외교 불안이 엄습하고 있다. 책임 있는 위치에 있던 분들은 반성부터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민의당은 다만 사드 장비 반입에 대해선 “환경영향평가도 실시하기 전에 한밤중 기습배치한 데 대해 유감을 표한다”며 절차상의 문제만 지적했다. 사드 배치에 부정적인 진보 중도층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보수 후보들은 사드 기습 배치를 계기로 안보 이슈를 전면에 꺼내들었다. 한국당과 바른정당은 문 후보의 대북관, 대미 외교, 안보관을 지적하는 논평을 잇달아 내며 십자포화를 쏟아냈다. 전날 TV토론회에서 ‘오로지 미국 주장을 추종만 하니 미국이 우리와 협의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던 발언이 주요 표적이 됐다. 

홍 후보는 주한미국상공회의소 특별간담회에서 “미국 선제타격을 가정할 때 좌파정부가 들어오면 한국과 협력이 안 된다고 본다”고 했다. 27일엔 사드 배치 예정지인 경북 성주도 방문할 계획이다. 바른정당 소속 김영우 국방위원장은 안보 유세를 위해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국립서울현충원까지 ‘안보·국론 통합을 위한 희망페달’ 자전거 국토대장정을 시작했다.

◇ 최대 쟁점… '일자리' 아니었나?

지난해 미국 대선의 최대 화두는 경제였다. 예상을 뒤엎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에는 "다른 나라에 빼앗긴 미국인의 일자리를 되찾아오겠다"는 약속이 가장 큰 몫을 했다. 영국이 '브렉시트' 찬반 투표에서 유럽연합(EU)을 탈퇴키로 결정한 배경에도 일자리가 있었다. 이민을 차단해 일자리를 지키자는 목소리가 유럽 통합의 가치를 넘어섰다.

한국 경제는 지난해 최악의 해를 보냈다. 2%대로 주저앉은 성장률은 '저성장 시대'의 고착을 재확인했고, 세계 상위권을 고수하던 주력 업종이 줄줄이 무너졌다. 수십만 젊은이를 '공시생'으로 만들 만큼 청년을 위한 일자리는 부족해졌고, 노후가 불안한 고령층은 생계를 위해 열악한 일자리로 내몰렸다.

박근혜정권의 실패로 이런 경제를 추스를 컨트롤타워가 무너진 상황에서 이번 대선이 시작됐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공공 일자리' 공약을,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민간 주도 일자리' 정책을 내놓으면서 정책 대결이 벌어지는 듯했으나 큰 쟁점이 되지는 못했다. 

이번 선거는 일자리를 '어떻게' 만들 거냐, 경제를 '어떻게' 살릴 거냐는 질문이 '누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냐, '누가' 경제를 살릴 수 있냐는 질문에 압도당한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정책 검증보다 인물 검증이 우선되면서 차이 더 선명한 '안보' 이슈만 계속 부각됐다. 정권교체가 기정사실화된 상황에서 비슷한 노선의 야권 후보 간 경쟁이 되다보니 정책 차별화가 뚜렷하게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 경제·복지 이슈를 무기력하게 만든 셈이다.

◇ 대형 공약의 실종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은 책 한 권 두께의 '공약집'을 만든다. 공약집은 후보의 국정 구상이 담기기에 매우 중요한 자료지만 일일이 들춰보는 유권자가 그리 많지는 않다. 이 때문에 각 캠프는 '10대 핵심 공약'을 추려서 다시 발표한다. 유권자의 기억에 남도록 '요점 정리'를 해주는 것이다.

10대 공약도 장황하게 여겨질 수 있어 '간판 공약'을 골라낸다. 유권자의 뇌리에 각인되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정책, 선거 판도를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는 약속을 전략적으로 던진다. 역대 대선마다 이런 공약은 거대한 이슈가 됐다.

2002년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는 '행정수도 이전'을 공약했다. 정부 기능을 충청권으로 대거 옮겨 지역균형발전을 이루겠다는 정책이었다. 동시에 충청표를 내 편으로 끌어들여 영남과 호남으로 나뉜 표심을 돌파하겠다는 전략이 깔려 있었다. 선거 기간 내내, 선거가 끝난 뒤에도 이 공약은 수많은 논란과 이슈를 낳았다.

2007년 17대 대선에서 가장 기억에 남고 가장 많이 회자된 건 이명박 후보의 '한반도 대운하' 공약이다. 천문학적인 예산을 들여 국토의 주요 강을 연결하겠다는 구상은 전형적인 '토목 공약'이었고, 환경 문제와 타당성을 비롯해 숱한 논란을 생산했다.

2012년 18대 대선은 후보들이 '경제민주화' 경쟁을 벌였다. 세계 경제의 신자유주의 질서가 한계를 드러내며 한국도 양극화의 골이 패일 대로 패인 터였다. 심지어 보수 정당의 박근혜 후보마저 경제민주화 '가정교사' 김종인씨를 영입해 여러 가지 관련 공약을 제시했다.

16대 '행정수도', 17대 '대운하', 18대 '경제민주화' 등 대선마다 선거판을 좌지우지한 '간판 공약'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선거가 2주 앞으로 다가왔지만 아직 이런 공약이 나오지 않고 있다. 문재인, 안철수 후보는 그동안 많은 공약을 발표했지만, 두 사람의 간판 공약이 각각 무엇인지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문재인 후보와 관련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말은 '적폐청산'이다. 이것은 "우리나라를 잘살게 만들겠다"에 버금갈 만큼 포괄적인 구호여서 공약이 될 수 없다. 안철수 후보는 '미래'와 '4차 산업혁명'을 많이 말했지만 역시 구체성이 떨어진다. 과거 대선처럼 '이슈 공약'이 될 수 있었던 건 '학제개편' 정도일 텐데, 이슈화되지 못했다.

19대 대선은 '공약 없는 선거'가 되고 있다. 갑작스럽게 치러지는 조기 대선, 여당이 사라진 '야 대 야 선거', 이미 기정사실이 된 정권 교체, 일찌감치 시작된 대세론 등이 원인일 수 있다. 공약은 각 후보가 제시하는 '미래 설계도'인데, 설계도 없이 사람 얼굴만 보고 미래를 선택하는 상황이 됐다. 간판 공약의 부재는 네거티브에 더 많은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