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패싱(Korea Passing)’을 의역하면 ‘미국의 한국 경시’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대응하면서 한국을 제외하고 중국 일본 등 주변국과 논의한다는 의미다. 한때 일본을 경시했던 미국의 외교행보를 표현한 ‘재팬 패싱(Japan Passing)’의 파생어로 볼 수 있다.
‘코리아 패싱’은 과거에도 언론 보도를 통해 몇 차례 사용됐다. 북한이 태양절(4월 15일·김일성 생일) 105주년과 인민군 창건일(4월 25일) 85주년을 맞아 군사 도발 수위를 높인 올 4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압박 외교행보가 우리나라 대통령선거와 맞물리면서 집중 거론되고 있다.
1. 대선 후보들의 ‘코리아 패싱’ 공방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와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는 25일 경기도 고양시 빛마루 방송지원센터에서 JTBC 주최로 열린 대선후보 4차 TV토론에서 ‘코리아 패싱’을 놓고 설전을 벌였다.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논쟁의 연장선이었다.
유 후보는 문 후보에게 “영어를 별로 안 좋아하시니까… 그런데 KAMD(한국형 미사일방어체계)는 영어로 말하셨다. ‘코리아 패싱’이라고 아시는가?”라고 물었다. 문 후보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유 후보는 “오늘 (북한) 인민군 창건일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사드는 그 자체로 중요한 게 아니라 한·미동맹의 상징”이라며 “문 후보는 한·미동맹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라고 다시 물었다.
문 후보는 “미국이 그렇게 무시할 수 있는 나라(한국)를 누가 만들었는가. 미국 주장을 추종만 하니 미국이 우리와 협의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 후보는 “그것은 억지”라고 되받았다.
2. 재팬 배싱, 패싱, 낫싱… 미국의 ‘말로만 동맹’ 한국·일본의 현실
‘코리아 패싱’은 ‘재팬 패싱’에서 응용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이 20년 전 경험한 ‘재팬 패싱’ 역시 ‘재팬 배싱(Japan Bashing)’의 파생어 격이었다. 이후 ‘재팬 낫싱(Japan Nothing)’까지 등장했다.
‘재팬 배싱’은 1980년대 미국의 대일무역 불균형에 대한 보복조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배쉬(Bash)’는 때린다는 뜻. 미국은 당시 경기침체에 시달린 반면 일본은 괄목할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국내총생산(GDP) 세계 2위로 도약한 시기도 그 무렵이었다. 일본의 대미무역은 10년 넘게 흑자였다.
미국 정부는 장기 불황과 높아진 반일 여론으로 일본에 시장 개방, 수입 확대를 요구했다. 미국 의회에서는 1987년 일본산 제품을 부수는 퍼포먼스까지 벌어졌다. 일본은 미국의 경제 압박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 ‘거품 경제’가 끝나고 ‘잃어버린 20년’이 시작된 이유를 ‘재팬 배싱’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재팬 배싱’은 일본에 큰 충격을 줬다. ‘말로만 미국의 동맹’인 현실을 확인한 계기였다. 이로 인해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외교적 경제적 경시나 무시를 당할 때마다 ‘재팬 배싱’을 응용한 표현을 만들었다. ‘재팬 패싱’과 ‘재팬 낫싱’이 그것이다.
‘재팬 패싱’은 1998년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빌 클린턴의 일본 경시 외교행보를 말한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동아시아를 순방하면서 일본을 건너뛴 채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갔다. 미국 민주당의 친중정책에 따른 행보였다. 그 후 ‘미국에 일본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의미로 ‘재팬 낫싱’이란 표현이 사용됐다. 미국에 외교적으로 의존하는 일본의 슬픈 현실을 나타낸 말이었다. ‘코리아 패싱’ 역시 마찬가지다.
국민일보 더피플피디아: 코리아 패싱, 재팬 배싱, 재팬 패싱, 재팬 낫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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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