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은 책 한 권 두께의 '공약집'을 만든다. 정치 경제 사회 안보 등 각 분야의 구체적 정책이 망라된다. 꽤 많은 돈이 드는 일이다. 정책을 만들기 위해 브레인을 동원해야 하고, 유권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문구와 디자인에 정성을 쏟는다. 이를 인쇄해 배포까지 하려면 선거비용 중 적지 않는 금액을 써야 한다.
이번 선거에선 "과연 공약집이 나올까?"란 말이 나돌기도 했다. 갑작스럽게 치르는 조기 대선이어서 정책을 개발할 시간이 많지 않은 까닭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돈 문제였다. 선거비용 보전 기준인 득표율 10%를 넘길지 불확실한 후보들이 공약집에 큰 돈을 들이려 할까, 의문이 제기됐었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가 가장 먼저 공약집을 발표했고,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 측도 준비 중이다. 공약집은 후보의 국정 구상이 담기기에 매우 중요한 자료지만 일일이 들춰보는 유권자가 그리 많지는 않다. 이 때문에 각 캠프는 '10대 핵심 공약'을 추려서 다시 발표한다. 유권자의 기억에 남도록 '요점 정리'를 해주는 것이다.
10대 공약도 장황하게 여겨질 수 있어 '대표 공약'을 골라낸다. 유권자의 뇌리에 각인되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정책, 선거 판도를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는 약속을 전략적으로 던진다. 역대 대선마다 이런 공약은 거대한 이슈가 됐다.
2002년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는 '행정수도 이전'을 공약했다. 정부 기능을 충청권으로 대거 옮겨 지역균형발전을 이루겠다는 정책이었다. 동시에 충청표를 내 편으로 끌어들여 영남과 호남으로 나뉜 표심을 돌파하겠다는 전략이 깔려 있었다. 선거 기간 내내, 선거가 끝난 뒤에도 이 공약은 수많은 논란과 이슈를 낳았다.
2007년 17대 대선에서 가장 기억에 남고 가장 많이 회자된 건 이명박 후보의 '한반도 대운하' 공약이다. 천문학적인 예산을 들여 국토의 주요 강을 연결하겠다는 구상은 전형적인 '토목 공약'이었고, 환경 문제와 타당성을 비롯해 숱한 논란을 생산했다.
2012년 18대 대선은 후보들이 '경제민주화' 경쟁을 벌였다. 세계 경제의 신자유주의 질서가 한계를 드러내며 한국도 양극화의 골이 패일 대로 패인 터였다. 심지어 보수 정당의 박근혜 후보마저 경제민주화 '가정교사' 김종인씨를 영입해 여러 가지 관련 공약을 제시했다.
16대 '행정수도', 17대 '대운하', 18대 '경제민주화' 등 대선마다 선거판을 좌지우지한 '대형 공약'이 있었다. 이런 공약을 제시한 후보는 모두 당선됐는데, 공교롭게도 그 공약들은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다. 행정수도 이전은 헌법재판소의 벽에 부닥쳐 행정중심복합도시로 축소됐고, 대운하는 반대 여론에 가로막혀 4대 강 사업으로 바뀌었다. 박근혜 후보는 당선되자마자 경제민주화 공약을 대놓고 '폐기'했다.
하지만 대형 공약의 존재는 분명히 순기능을 갖고 있다. 정책 규모가 거대하다 보니 시대의 요구를 반영해야 하기에 국가 미래의 방향타가 될 수 있다. 네거티브가 난무하는 검증에서 벗어나 유권자 관심을 '정책'으로 돌리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번엔 선거가 2주 앞으로 다가왔지만 아직 이런 공약이 나오지 않고 있다. '양강'을 형성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와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는 그동안 많은 공약을 발표했지만, 두 사람의 간판 공약이 각각 무엇인지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문재인 후보와 관련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말은 '적폐청산'이다. 이것은 "우리나라를 잘살게 만들겠다"에 버금갈 만큼 포괄적인 구호여서 공약이 될 수 없다. 안철수 후보는 '미래'와 '4차 산업혁명'을 많이 말했지만 역시 구체성이 떨어진다. 과거 대선처럼 '이슈 공약'이 될 수 있었던 건 '학제개편' 정도일 텐데, 이슈화되지 못했다.
19대 대선은 '공약 없는 선거'가 되고 있다. 갑작스럽게 치러지는 조기 대선, 여당이 사라진 '야 대 야 선거', 이미 기정사실이 된 정권 교체, 일찌감치 시작된 대세론 등이 원인일 수 있다. 이번 선거는 박근혜정부의 실패를 딛고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는 무대다. 공약은 각 후보가 제시하는 '설계도'인데, 설계도 없이 사람 얼굴만 보고 미래를 선택하는 상황이 됐다. 간판 공약의 부재는 네거티브에 더 많은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