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적(主敵)이 바뀌었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선후보가 ‘하숙집 친구 흥분제’ 논란으로 원내 4개 정당 후보들로부터 십자포화를 맞고 있다. 북한을 주적으로 규정하지 않아 공세에 시달렸던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에서 홍 후보로 대선판의 주적이 뒤바뀐 형국이다. 홍 후보의 경우 이념이나 정책에서 비롯된 정치적 논란이 아닌 대학생 시절 성범죄 모의 가담으로 더 큰 비판 여론과 직면했다. 홍 후보는 사과했지만, 원내 4개 정당 후보들은 일제히 사퇴를 촉구했다.
홍준표, 애매한 페이스북 사과문
홍 후보는 2005년 자전적 에세이집 ‘나 돌아가고 싶다’ 122쪽에 대학생 시절 돼지 흥분제를 이용한 하숙집 친구의 성범죄 모의에 가담하려 했다는 사실을 적었다. 하숙집 친구가 마음에 드는 여학생과 교제하고 싶다는 이유로 요구한 돼지 흥분제를 홍 후보 등 친구들이 구해줬다는 내용이다. 친구는 야유회에서 여학생에게 돼지 흥분제를 먹여 성범죄를 시도하려 했지만, 여학생이 일어나면서 미수에 그쳤다고 홍 후보는 고백했다.
이런 사실이 재조명을 받으면서 홍 후보는 성범죄 모의 가담 논란에 휘말렸다. 홍 후보는 22일 오전 7시32분 페이스북에 사과문을 적었다. 그는 “책의 내용과 다소 다른 점은 있지만, 그걸 알면서 말리지 않고 묵과한 것은 크나큰 잘못이다. 그 당시(자서전을 발간하면서) 잘못에 대해 반성한 일이 있다”고 적었다. 여기까지는 자신의 문제점을 나열하고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한 보통의 사과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홍 후보는 용서를 구하다 돌연 태도를 바꿨다.
그는 “45년 전의 잘못이다. 이미 12년 전 스스로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다. 이제 와서 자서전 내용을 재론하는 것을 보니 나에 대해선 검증할 것이 없긴 없나 보다. 어릴 때 저질렀던 잘못이고 스스로 고백했다. 이제 그만 용서해 달라”고 적었다. 자신을 향한 비판을 네거티브 공세 정도로 여긴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발언이었다. 그의 발언은 불붙은 비판 여론에 기름을 쏟았다. 페이스북에는 “전혀 반성하는 태도가 아니다”라는 항의가 빗발치고 있다.
원내 4당 후보들 “성범죄 불용, 사퇴하라” 촉구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정치권에선 홍 후보에게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더욱이 애매한 태도로 사과한 홍 후보의 페이스북 글은 논란의 불씨를 키웠다.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바른정당은 홍 후보의 페이스북 사과문을 놓고 한목소리로 비판했다.
문 후보 대선캠프의 남인순 여성본부장은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가진 젠더폭력 정책 브리핑에서 “홍 후보가 자서전에 약물을 이용한 성폭력 범죄에 가담한 사실을 자랑삼아 소개했다. 온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며 “국민으로부터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남 본부장은 ‘전해 들은 이야기’라고 해명한 홍 후보를 향해 “거짓으로 해명하는 홍 후보는 원천적인 공직 무자격이다. 국민 앞에서 석고대죄를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 측 김유정 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은 논평을 내고 “어릴 때 저질렀던 잘못이고 스스로 고백했다고 하면 그만인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문제”라며 “대학생 시절 성범죄 가담 전력을 자랑이라고 자서전에 쓴 홍 후보의 ‘멘탈(mental‧정신)’이 더 가관이다. 대통령 후보로서 이미 자격상실”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더 이상 낯 뜨거운 변명으로 왈가왈부하지 말고 즉각 후보사퇴를 촉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의 이지현 대변인은 논평에서 “실망스럽다 못해 국제적인 망신거리다. 페이스북에 ‘용서를 구한다’면서 ‘검증할 것이 없긴 한가 보다’라는 오만한 표현으로 본색을 드러냈다”며 “본성은 바꿀 수 없는 모양이다. 변명과 사과의 문제가 아니다. 성범죄 행위에 가담한 점도 놀랍지만, 굉장한 무용담처럼 자서전에 쓴 심리도 놀랍다”고 밝혔다. 이혜훈 의원 등 바른정당 전‧현직 여성 의원들은 하루 전 “대통령 후보로서 자격이 없다“며 사퇴를 촉구했다.
심상정 후보의 정의당은 연일 드러난 홍 후보의 ‘여성 비하’를 지적했다. 정의당 한창민 대변인은 지난 21일 “홍준표라는 인물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얼마 전 내뱉은 ‘설거지는 여자의 일’이라는 시대착오적 여성 비하 발언과 무관하지 않다”며 “홍 후보는 드러난 사실만으로 자격을 상실했다. 거취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