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분의 아이들 세상] 청소년 비행과 언어 발달

입력 2017-04-14 08:51
이호분 연세누리 정신과 원장

청소년 비행 문제라 하면 우선 부모의 양육태도, 사회적 환경에서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대다수는 이런 접근이 맞다. 하지만 비행청소년들 중에는 뇌기능 상의 어려움으로 정상적인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일탈 집단에 속하게 되는 아이들도 의외로 많다. 뇌기능 상의 문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는 언어발달의 문제가 방치돼 생기는 경우가 있다.

P는 중학교 2학년 남학생이다. 폭력 서클 아이들과 어울리며 학교에서 문제아로 찍힌 상태다. 전학을 가야 하는 위기라며 병원을 찾아 왔다. 초등학교 3학년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단지 발표를 못하고 글쓰기를 유난히 싫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4학년이 되면서 과제가 힘들어지자 숙제조차 하지를 않았다. 당연히 선생님에게 자주 야단을 맞았다. 그러다 차츰 공부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품행이 바르지 못한 아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으며 중학교에 와서는 본격적인 비행이 시작됐다.

P와 이야기를 나눠 보니 눈치는 빠르고 상황 파악은 잘하는 아이였다. 하지만 말이 어눌하고 단답형이었다. 길게 말할 때에도 중학생 수준의 논리적인 면은 전혀 없고 단순한 사실의 나열에 불과했다. 게다가 앞뒤 설명 없이 튀어 나오는 말을 이해하기가 퍽 어려웠다. 

사용하는 단어의 수준도 낮고, 단어가 쉽게 안 떠오르는지 ‘어어’ 하는 등의 간투사가 많았다. 학교에서 친구의 잘못으로 누명을 쓴 경우도 있었는데 그때도 항변하지 못했던 경우가 꽤 있었다. 화가 나도 말로 하기 힘드니 주먹이 먼저 나온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자주 억울하게 처벌을 받다 보니 분노와 반항이 점점 늘어갔다.

비행을 저지르는 아이들 중에는 지능이 정상인데도 이런 문제로 학습 장애를 겪는 아이들이 의외로 많다. 자기들 끼리 통하는 단순한 의사소통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나이에 맞는 의사 표현을 잘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P의 경우처럼 자연히 공부도 어렵고 나이가 들수록 평범한 아이들과 관계형성이 되지 않다보니 자연히 행실이 나쁜 아이들과 어울리게 되는 것이다.

P는 뇌기능 상의 문제로 단어의 저장과 인출이 어려운 아이였다. 언어 검사를 자세히 해보면 문제를 발견할 수 있지만 말자체가 많이 늦지 않았기 때문에 주변에서 대개는 문제를 모르고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아이들은 어휘를 습득하고 인출하는 과정을 세분화해서 도와줘야 한다. 새로운 단어는 ‘자신의 말로 풀어서 남에게 가르쳐 주는 식’으로 인식해 저장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인출’ 훈련에 대해서는 고치기 쉽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는 글쓰기가 말하기보다 낫다. 관심 있는 사건에 대해 말로 하기 전에 컴퓨터를 이용해 글을 써서 저장하고 적절한 단어를 쓸 때까지 고쳐서 글을 완성하도록 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 다음 말로 표현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비행이 많이 진행된 상태라면 이런 노력만으론 부족하다. 심리적인 개입, 인지행동 치료, 사회 기술훈련, 부모교육 등을 병행해야 한다. 아이가 스스로 위기에 처했을 때 언어적으로 잘 해명하지 못해 야단을 자주 맞거나 학습 부진, 학습장애를 보인다면 이를 의심해 봐야 한다. 조기 발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호분(연세누리 정신과 원장, 소아 청소년 정신과 전문의)

대전=정재학 기자 jhje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