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한 청년이 두만강을 건넜다. 식량을 구해 굶주린 부모를 어떻게든 살려보겠다고 중국으로 불법 월경을 한 것이다. 이미 두 누나는 아사(餓死)한 뒤였다.
접경지대에서 음식을 구해 다시 고향땅인 함경북도 청진으로 갔다. 그리고 보위부로 끌려갔다. 모진 심문을 당한 뒤 풀려났지만 청년의 미래는 북한 땅에 없었다. 1997년 그렇게 탈북민이 됐다.
숨어 다니며 온갖 일을 했고 중국 각지를 떠돌았다. 그때 비밀리에 탈북민 선교활동을 하던 열방빛선교회(황금종교회) 최광 목사를 만나 성경공부를 하면서 크리스천이 됐다. 스스로 북한선교사가 돼 북·중 접경지대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탈북민들을 도왔다.
또 중국 공안에 체포돼 고문까지 당했다. 누구 지시로 기독교를 전파했고 접촉한 탈북자들 인적사항과 신병을 대라고 했다. 온 몸에 피멍이 들 정도로 맞기도 했다.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남한 선교사들의 항의 끝에 풀려났다.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2002년 고단했던 중국생활은 그렇게 끝났다.
서울 노원한나라은혜교회 김성근(41) 목사의 이야기다. 몇 번이나 죽음을 무릅써야 했던 그는 다시 한국에 돌아오자 학업을 이어갔다.
연세대 중어중문학과, 장로회신학대학원 신학과를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전도사로, 부목사로 열정적인 삶을 이어갔다.
지난해 7월 서울 노원구 한 건물에 탈북민 교회를 개척했다. 2004년에 결혼해 단란한 가정도 꾸렸다.
그런 그에게 얼마 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소화가 안 되고 메스꺼운 증상이 이어져 병원 진료를 받았는데 간경화 3기 진단이 내려졌다. 이식수술을 받지 않으면 당장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
두 달 전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했다. 안타까운 소식을 들은 대전 반석교회 천승현 목사가 자신의 간을 이식해주겠다고 선뜻 나섰다.
천 목사 이외에도 장기 기증을 하겠다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최 목사와 20대 탈북민 청년….
그런데 병원 측은 난색을 표했다. 장기이식 등에 관한 법률 때문이었다. 친족이 아닌 타인 간 장기기증의 경우 반드시 보건복지부 산하 질병관리본부 장기이식관리센터 승인을 받아야한다.
김 목사 아내 최진지 사모는 관리센터로 달려갔지만, 센터 측은 “친족이 아닌 타인 간 장기이식의 경우 기증자와 이식대상자가 오랜 기간 친분을 맺어온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는 업무지침을 보여줬다.
기증 의사를 보인 사람들과 김 목사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판정도 내렸다. 이 센터 관계자는 “고교 동창이라든지 부부 정도는 돼야 한다. 관련서류를 갖춰 신청하면 승인 여부를 판단해 보겠다”고만 했다. 또 “우리는 작성한 서류만 보고 승인 여부를 결정할 뿐, 직원이 없어 실사 나가기가 어렵다”고 했다.
기증할 사람이 있고, 기증받지 못하면 생명을 잃는 환자가 있는데도 장기기증관리센터는 요지부동이었다. 김 목사의 가족은 달랑 최 사모와 열두살 딸 뿐이다.
최 사모는 간이 작아 기증이 불가능하고, 딸은 미성년자로 역시 기증이 불가능하다.
“북한에 살 때 힘들게 살아 그런지 간이 안 좋네요. 수술 요건도 안 된다 하니….”
야윈 채 병상에 누운 김 목사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여러 번 역경을 헤쳐 나온 용기마저 잃은 듯했다.
최 사모와 딸은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다. “아이처럼 순수한 사람이에요. 중국어를 가르쳐주며 친해졌죠. 이 사람이 절 너무 사랑해줬습니다. 아직도 이 사람은 북녘 땅 지하교회를 섬기는 주님의 종들에게 제대로 된 사역자를 보내겠다는 일념뿐이에요.”
부부와 딸 세 명의 맑은 눈동자에 눈물이 어렸다. 불법 장기밀매를 감시한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공공기관의 관료주의 행태가 야속했다.
90년대 말 탈북민 시절부터 김 목사를 알아온 최 목사는 “마음 착한 김 목사가 북한에서 굶주리고 제대로 영양섭취도 못해 B형 간염이 걸렸는데 이젠 간이식 밖에 소생시킬 길이 없다”며 “동토를 넘어 하나님과 자유를 찾아온 그에게 우리 사회가 따뜻한 손길마저 외면해선 안 된다”고 했다.
글·사진=유영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