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기를 하다 보면 자꾸 깜박깜박 딴 데로 새서…. 중간에 돌아오려고요(웃음).”
무려 종이와 펜을 준비하고 인터뷰에 나선 배우라니. 장혁(본명 정용준·41)은 볼펜을 꽉 쥔 채 호기롭게 테이블에 앉았다. 물론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종이는 깨끗했다. 사실 메모 따윈 필요치 않았다. 질문 하나에도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답변들. 그 짧은 시간동안에조차 그에겐 열정이라는 게 뿜어져 나왔다.
조각 같은 외모. 자로 잰 듯한 액션. 본인의 ‘자타공인’ 강점들을 모두 내려놓고 장혁은 과감히 영화 ‘보통사람’을 택했다. 격동의 1980년대 소시민들의 투쟁을 그린 영화에서 그는 냉혈한 안기부 차장 최규남 역을 맡았다. ‘의뢰인’(2011) ‘순수의 시대’(2015)에 이은 세 번째 악역이다.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장혁은 ‘보통사람’ 출연을 결심한 두 가지 이유를 꼽았다. 첫째는 손현주 선배가 하니까, 둘째는 연기 스펙트럼을 넓히고 싶어서. 드라마 ‘타짜’(SBS·2008)에서 함께했던 손현주와 다시 호흡을 맞추고 싶은 마음에 그는 이 작품 시나리오를 먼저 찾아봤고, 안타고니스트(antagonist·적대자) 캐릭터에도 한 번쯤 도전해야 할 시기라는 생각에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규남을 연기하기란 꽤나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폭력적인 성향이 내재돼있는데다 타인을 무시하고 아랫사람 대하는 듯한 언행을 일삼는 인물이기 때문. 공식석상이나 무대인사에 설 때마다 장혁이 “배역은 미워하되 배우는 미워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콕 집어서 말하긴 어렵지만 캐릭터 자체가 좀 그렇더라고요. 어쨌든 배우로서는 최선을 다해 연기하고 관객들에게 그 인물을 보여줘야 되는데, 관객 입장에서는 (배우의 노고보다는) 그 역할로만 보는 경우가 많잖아요. 근데 규남은 제가 봐도 싫더라고요(웃음). 그래서 배역이 미워도 배우는 미워하지 마시라고 말씀을 드린 거죠.”
규남은 80년대 군부독재 당시의 시스템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뚫을 수 없는 거대한 벽 같은 이미지를 줘야 했다. 느릿느릿 조곤조곤 말하는 디테일은 장혁의 아이디어였다. 그는 “규남의 배경을 지우고 가만히 음성만 들어보면 딱 아기를 대하는 말투”라며 “상대방를 대우해주는 듯하지만 사실은 굉장히 밑으로 보고 있는 느낌을 표현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완성된 영화를 본 소감에 대해서는 “굉장히 막막하고 먹먹했다”고 했다. 초등학생이었던 당시 체감하지 못했던 정서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장혁은 “영화를 보니 우리 부모님 세대가 얼마나 막막했을까 싶더라”며 “그러면서 먹먹한 감정이 함께 올라왔다. ‘굳이 저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마음이 들었다”고 얘기했다.
“시위의 역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잖아요. 옛날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그 주제는 다를지라도 시위 자체는 계속될 테죠. 현 시국을 봐도 국민으로서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고요. 요즘 뉴스를 보면 안 좋은 소식들이 대부분인 것 같아요. 가장 큰 염원이 있다면 좋은 뉴스가 좀 더 많아졌으면 하는 겁니다.”
장혁은 본인 역시 ‘보통사람’이라고 했다. “보통사람이란 게 그런 거 아닌가요? 도덕적 욕구와 동시에 사심(私心)이 존재하고, 이루지 못해 좌절하면서도 꿈을 꾸며, 지켜야 하는 틀 안에서 상식적인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요.”
배우로서도 물론 ‘보통배우’의 범주에 속한다고. 그러나 연기만큼은 잘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지금보다 좋은 배우가 되고 싶냐고 하면, 네. 지금 여기서 멈추고 싶냐고 하면, 아니요.”
단국대 연극영화과 출신으로 1997년 드라마 ‘모델’(SBS)을 통해 데뷔한 장혁은 어느덧 21년차 배우다. 20편의 드라마와 16편의 영화에 출연한 베테랑. 인생작 ‘추노’(KBS2·2010)로 당당히 연기대상까지 거머쥐었다. 그런 그가 아직까지도 카메라 공포증에 시달린다면, 과연 믿겠는가.
“학교 다닐 때 친구들과 조를 짜서 영화를 만들곤 했었어요. 그런데 실제 현장 분위기는 전혀 다르더라고요. 카메라 뒤 90~100명 되는 스태프를 보는 순간 얼어버렸죠. ‘여기서 어떻게 연기를 하지?’ 더구나 카메라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볼 거란 생각을 한 순간 카메라 공포증이 왔어요.”
그는 “지금은 물론 현장이 익숙해졌지만 공포증은 여전히 남아있다”면서 “준비가 안 됐을 때 특히 그렇다. 그래서 더 철저하게 준비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연기에 대한 흥미가 50%, 경험치가 25%라면 나머지 25%는 긴장감이 좌우한다.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는 의연한데, 그렇지 않을 경우 긴장이 된다”고 털어놨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다. 지치지도 않는다. 장혁은 “빨리 다음 작품을 해야 하지 않겠나. 피 튀기게 살아가야 한다”고 의욕을 불태웠다. 무한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건 배우의 숙명이라면서.
“누군가 나를 찾지 않으면 끝이거든요. 그래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개발하려는 거예요. 작품을 안 하면 제 연봉은 제로(0)거든요. 어떻게 내 것을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시각이 20~30대 때와는 분명히 달라요. 이제는 40대 초반의 배우로서 앞날을 꾸준히 계획해나가야죠.”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