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수도 빈(비엔나)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꼽힌다. 머서컨설팅그룹이 지난 3월 발표한 ‘도시별 삶의 질 순위 보고서’에서 8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빈을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든 이유 중 하나로 빈시의 정책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좌파인 사민당이 1945년 이후 지금까지 빈시장 자리를 독점하면서 일관되게 사민주의적 정책을 펼쳤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 달 28일부터 8일간 유럽 3개 도시 순방을 하면서 빈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물며 공공임대주택, 신도시, 보행거리, 도시재생 등의 현장들을 둘러봤다.
칼 마르크스 호프… 80여년 전 제시된 공공임대주택의 모범
빈시가 노동자들의 주거 안정을 위해 빈 외곽에 1930년 건축한 대규모 공공임대주택이다. 사민당 시정부의 핵심 프로젝트이자 오늘날 ‘주거복지 강국’ 오스트리아를 상징하는 건축물이기도 하다.
칼 마르크스 호프(Karl Marx Hof)는 건물 길이가 1100m에 달하고, 총 1382호의 주택에 5500여명이 입주해 있다. 공동세탁장, 유치원, 병원, 우체국 등 공공시설이 전체 건물 면적의 20%를 차지하고 있다. 공동주택이 4면을 둘러싸고 그 가운데 커뮤니티 공간으로써 정원을 배치한 구조가 넓은 녹지대 위에 길게 이어져 있다.
빈시는 서민들의 주거 안정을 위해 80여년 전부터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했다. 현재 빈 시민의 60% 정도가 공공임대주택에 거주하고 있다. 시영아파트가 25% 되고, 나머지도 시가 투자한 민관협력형 ‘사회주택’이다. 빈 시민 중 무주택자는 누구나 공공임대주택을 받을 수 있다. 공공임대주택의 평균 임대료는 인근 런던이나 파리, 취리히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집을 사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소비할 여력이 생긴다.
서울시 임대주택은 작년 말 기준 25만8634가구로 전체 주택 중 7%에 불과하다. 박 시장 취임 후 5년간 10만여가구가 늘었다.
아스페른 스마티 시티… 도시개발의 미래
빈 외곽 22구에 조성 중인 ‘아스페른(Aspern) 스마트 시티’는 빈시 최대 규모의 도시개발 프로젝트다. 아스페른은 1970년 공항이 폐쇄되면서 오랫동안 버려진 땅이었다. 2008년 경제위기를 계기로 빈시가 경기부양 차원에서 개발을 시작해 현재 4분의 1 정도가 완료됐고 6000여명이 거주 중이다. 2028년까지 2만여명이 거주하는 신도시로 만들어진다.
아스페른 스마트 시티는 에너지를 주제로 계획된 신도시다. 친환경 에너지 기술과 저에너지 건축 기술, 정보통신기술(ICT) 등을 적극 활용해 ‘제로 에너지’를 넘어 ‘플러스 에너지’를 지향한다. 건물들은 모두 단열, 채광 등으로 에너지를 절감하고, 쓰레기소각열과 지열을 사용하며, 태양광 에너지를 생산하도록 설계됐다.
또 이산화탄소 감축을 위해 자동차 없이 생활이 가능하도록 도시 전체를 설계했다. 거주자들이 신도시 안에서 모두 일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생산시설을 함께 유치하기 때문에 시내 중심지로 통근할 필요가 없다. 신도시 내에서는 도보나 자전거, 대중교통만으로 생활이 가능하고, 시내와는 전철로 연결돼 있다.
이 지역에서 최초로 완공된 사무용 빌딩인 ‘IQ빌딩’은 ‘플러스 에너지 하우스’라고 불린다. 태양광 등을 이용해 빌딩 전체에서 쓰고도 남을 정도의 에너지를 자체 생산한다.
IQ빌딩 내에는 ASCR(Aspern Smart City Research)이 입주해 있다. 사람들이 실제 거주하는 이 지역 공동주택과 오피스 빌딩을 상대로 에너지 소비 패턴과 효율을 연구하는 유럽 내 유일한 기관이다. ASCR은 유저(입주자)들의 에너지 소비 행태와 건축물의 에너지 효율에 대한 정보를 하루 100만건 이상 수집한다. 여기서 분석된 결과를 건축물 설계와 도시개발에 적용한다.
주거단지에 위치한 공동주택 ‘야스페른(JAspern)’은 에너지 효율이 극대화된 주거지 모델을 보여준다. 건물 안으로 자연광이 최대한 들어오게 설계해 조명 사용을 최소화했다. 그러면서도 직사광선을 차단해 여름에도 시원하다. 난방은 시에게 공급하는 쓰레기소각열을 이용하고, 냉방은 지열을 활용한다. 아스페른 내에는 자연광만 쓰도록 설계된 학교도 있다고 한다.
자르파브릭… 코하우징이라는 흐름
빈에서는 거주자들이 건축 설계 단계부터 참여해서 건축가와 함께 집을 짓는 코하우징(Co-Housing)이 유행이다. 현재 30여개 코하우징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빈의 가장 대표적인 코하우징 프로젝트는 1999년 완공된 자르파브릭(Sargfabrick) 협동주택이다. 110가구 200여명이 입주해 있는 이 임대주택은 주민들이 협동조합을 구성해 수백 번의 토론을 거쳐 11년 만에 완공했다.
빈시는 임대주택을 짓겠다는 사람들이 모여 조합을 구성하면 건축비를 융자해 준다. 자르파브릭의 경우, 25명의 조합원이 모여서 시작했으며 전체 건축자금의 88%를 시에서 30년간 장기 저금리(이자 1%)로 융자받았다.
자르파브릭을 상징하는 디자인 요소는 오렌지색 외벽과 넓은 복도다. 복도를 넓게 만들어 놀이공간이자 이웃들과의 커뮤니케이션 공간이 되도록 했다. 지하에는 공연장, 카페, 수영장, 도서관 등이 있다. 또 커다란 공동부엌을 두어 손님 접대나 행사에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공용공간이 넓은 탓에 개인공간은 작아도 충분하다.
입주자대표는 “도시에 살지만 함께 사는 삶이 좋다. 멋진 건축물에서 살고 있다는 점도 좋다”고 만족감을 표시했다. 자르파브릭의 건축가 프란츠 숨니치는 왜 코하우징이 유행이냐고 묻자 “개인적인 삶에서 함께 사는 삶으로 사람들의 가치관이 변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서울시는 오는 9월 1일부터 11월 5일까지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를 처음 개최한다. 이 자리에서 ‘모델 비엔나’라고 불리는 빈의 공공주택 모델을 집중적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마리아힐퍼 스트라세… 보행거리의 매력
‘빈의 명동’이라고 불리는 핵심 상업지역을 관통하는 간선도로였다. 빈시는 2010년 이 거리를 보행자거리로 만들기로 결정하고 논의를 진행해 2014년 주민투표를 거쳐 2015년부터 보행자거리로 전환했다. 현재는 빈을 대표하는 보행명소이자 유럽에서 가장 긴 쇼핑거리로 유명하다.
마리아힐퍼 스트라세(Mariahilfer Strasse)는 전체 1.6㎞로 양쪽 끝은 차와 사람의 공유도로이다. 이 구간에서 차량은 시속 20㎞ 이하로 운행해야 한다. 가운데 구간 450m가량은 보행자 전용도로이다. 전체 구간 중 딱 한 군데 주민들의 요구를 수용해 보행도로를 가로지르는 차도(1차선)를 허용하기도 했다. 사람과 자전거, 자동차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도로 전체는 턱이 없도록 세심하게 단장했다. 가로수는 그대로 살려놨고, 곳곳에 벤치를 풍부하게 배치했다. 다음 달 서울역고가도로를 재생한 공중보행로 ‘서울로 7017’ 개장을 앞두고 있는 박 시장은 전 구간을 직접 걸어보고 나서 “이렇게 보행자 전용거리를 만들어 놓으니 시민들이 좋아하고, 인근 가게에 손님들이 늘고, 대기질도 좋아지니까 일석삼조가 아니냐”라고 말했다.
가소메터 시티… 명소로 재생된 산업유산
1986년까지 87년간 빈 전역에 가스를 공급하던 원통형의 가스저장고 4개를 지난 2011년 주거단지 및 쇼핑몰로 재탄생시켰다. 600여가구의 주택과 기숙사, 유치원, 공연장 등 문화시설, 대단위 쇼핑단지가 들어차 있다. 주거복합단지로 변신한 후 도시 외곽의 낙후된 산업지역이던 이 동네는 사람들이 찾아오고 주변이 잇달아 개발되는 명소로 떠올랐다.
가소메터 시티(Gasometer City)는 이름 그대로 해석하면 ‘가스저장고 도시’다. 4명의 건축가가 각각 하나씩 가스저장고를 맡아 지상부는 공동주택으로, 지하부는 쇼핑몰로 개조한 후 서로 연결했다.
시민들은 가스저장고가 수명을 다하자 혐오시설이라며 철거를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빈시는 산업시대의 상징인 가스저장고 외벽을 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하도록 했고, 시민들을 설득해 오늘날과 같은 명소로 재생시켰다.
빈=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