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양념’… 말 한마디가 좌우하는 ‘말꼬리 대선’

입력 2017-04-09 08:38

안희정 충남지사는 민주당 경선에서 좀 더 잘할 수 있었다. 최근 나타난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의 상승세 못지않게 안 지사도 ‘흐름’을 탔었다. 2월 5일 공개된 국민일보-KSOI 조사에서 지지율 15%를 처음 넘기며 돌풍을 일으켰다. 2주 뒤 같은 기관 조사에선 23.3%로 문재인(31.9%) 후보와의 격차를 한 자릿수로 좁혔다.

2주 만에 8%포인트나 급등한 지지율이 발표된 이날 안 지사는 부산대에서 강연을 했다. ‘즉문즉답’ 순서에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도 선한 의지로 국민을 위해 좋은 정치를 하려 했는데 뜻대로 안 됐던 것”이란 말을 했다. 이 ‘선의(善意)’ 발언이 발목을 잡았다. 그 직후 상승세가 꺾이며 ‘안희정 돌풍’은 잦아들었고, 결국 결선투표로 가지 못했다.

‘선의’와 ‘분노’… 두 단어로 결판 난 경선

안 지사는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어 많은 공약을 발표했다. 남경필 경기지사와 함께 행정수도 이전을 약속했고, 공정한 시장질서와 분권형 지방자치를 역설했다. 이런 정책은 그의 경선 레이스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안 지사가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을 가리켜 ‘선의’란 말을 했다”는 사실뿐이다.

‘선의’ 발언이 이렇게 큰 여파를 몰고 온 데에는 문재인 후보도 한 몫을 했다. 문 후보는 “안 지사의 선의 발언엔 분노가 빠져 있다”는 말로 논란을 증폭시켰다. ‘선의’란 말의 꼬리를 이보다 더 자극적으로 잡아챌 수 있는 표현은 없을 것이다. 민주당 경선은 ‘선의’와 ‘분노’, 두 단어로 사실상 결판이 난 거였다.

문재인 후보도 제1야당의 1위 후보답게 많은 말을 해야 했고, 여러 번 꼬리를 잡혔다. “북한에 먼저 가겠다”는 말은 안보관 문제로 불거졌다. “내가 대세 맞습니다” 했다가 벌써 대통령 된 것처럼 구느냐는 비판에 시달렸다. 경선후보 토론에서 했던 “특전사 시절 전두환 여단장에게 표창을 받았다”는 말은 ‘호남인에게 사과하라’는 황당한 요구로 이어졌다.

‘공약집’보다 중요해진 ‘한마디’

국정농단 사태 이후 문 후보는 한 번도 지지율 1위를 놓치지 않았다. 차기 대통령으로 가장 유력한 ‘대세 후보’여서 그가 내세우는 정책은 누구의 공약보다 구현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전두환 표창장’만큼 주목을 끈 ‘문재인 정책’은 없었다. 거의 매주 공약을 발표해 왔지만, 정책이 그의 경선 승리를 이끌었다고 말할 평론가는 아마 없을 것이다.

문재인 후보가 경선에서 승리한 뒤 오히려 안철수 후보에게 추격을 허용한 과정에도 ‘말 한마디’가 작용했다. 반문(반문재인) 의원들이 당한 문 후보 지지자들의 ‘문자폭탄’을 놓고 그는 “경쟁을 흥미롭게 해주는 양념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양념’ 발언은 문재인 지지와 반대의 중간지대에 있던 이들을 돌아서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

민주당 경선이 끝난 뒤 문재인 후보를 지지해야 할지 고민했다는 한 수도권 유권자는 “문자폭탄이 양념이란 말을 듣고 지지를 접었다”고 했다. 그는 “골수 지지자들이 듣기엔 좋은 말이겠지만 나 같은 사람에겐 기대를 접게 하는 말이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금까지 여러 후보가 내놓은 공약 중 가장 파격적인 것을 꼽자면 안철수 후보의 ‘학제 개편’이 몇 순위 안에 들 것이다. 과거 어느 대선에서도 이슈가 된 적이 없는 아이디어였다. 이제 지지율 30%대에 안착했고 가상 양자대결에선 문재인 후보를 꺾는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으니 그 역시 유력한 대선후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지금 관심의 대상은 이런 정책보다 그가 조폭과 사진을 찍었느냐, 그의 부인이 무슨 말을 했었느냐가 됐다.

“후보의 입을 막아라” 비상 걸린 캠프

이러니 후보의 말실수를 막는 게 캠프마다 가장 중요한 선거 전략이 돼버렸다. 집중 표적이 돼온 문재인 후보 캠프는 일찌감치 ‘메시지 관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사안마다 어떤 ‘말’을 내놓을지 토론과 검증을 거쳐 선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안철수 후보 등 다른 캠프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거침없는 발언으로 ‘홍트럼프’란 별명까지 얻은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거의 유일한 예외일 테다.

어느 선거보다 말 한마디가 민감해진 까닭은 이번 대선이 갖는 독특한 성격에 기인한다. 우리는 ‘집권당 후보’가 없는 선거를 치르고 있다. 박근혜정권의 실패에 따른 조기 대선이기에 기존 야당의 집권 가능성이 높고, 그 후보들의 정책적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정책적 차별화가 무뎌지니 후보를 가늠하는 기준이 자꾸 지엽적인 사안으로 흐르는 것이다. 무너진 국정을 바로세워야 하기에 어느 때보다 '정책 선거'가 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데, 선거판의 현실은 자꾸 그 반대로 가고 있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