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참 이상한 날이었다. 지독히 외롭고 쓸쓸하고 고통스러웠던 순간, 반짝이는 그녀가 나타났다. 슬며시 다가와 해맑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어딘지 그와 닮았다. 영화 ‘어느날’은 그렇게 시작한다.
보험회사 과장 강수(김남길)는 맥 빠진 얼굴로 걷고 또 걷는다. 사랑하는 아내(임화영)를 잃은 절망감에 차마 장례식에조차 가지 못한다. 간신히 일상으로 돌아온 그는 회사에서 새 일거리를 떠맡는다.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미소(천우희) 측 대리인에게 합의를 받아오라는 것. 미소가 입원해있는 병원은 아내가 숨을 거뒀던 바로 그 곳이었다.
착잡해하는 강수 앞에 한 여자가 나타나고, 그는 자신이 미소라고 소개한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미소의 영혼이 강수에게만 보인다. 처음에는 기절할 만큼 놀랐던 강수. 그러나 그는 서서히 마음을 열고 미소의 존재를 받아들인다.
먼저 미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준다. 소중한 지인의 결혼식을 보러 가게 해달라는 소박한 소원도 들어준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알아간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남자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던 여자. 남들은 모를 둘만의 세계에서 강수와 미소는 오직 서로를 위한 위로가 되어 준다.
‘어느날’에는 반갑게도 이윤기 감독 특유의 깊은 감성이 묻어났다. 전작 ‘여자, 정혜’ ‘멋진 하루’ ‘남과 여’ 등에서 그랬듯 이 감독은 어떤 배경 혹은 공간 안에 놓인 인물의 내면을 차분히 따라갔다. 주특기인 멜로는 이번 작품에서 쏙 빠졌다. 로맨스 대신 판타지 요소를 가미했다.
영화는 내면의 상처와 치유에 대한 이야기다. 예기치 않게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슬픔에 잠겨 있는 강수. 시각장애를 안고 태어나 엄마(정선경)에게 버림받고 외로움이란 걸 가장 먼저 배운 미소. 각각의 결핍과 절박함을 안고 운명처럼 만난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의 빈곳을 채워주는 동반자가 된다.
훌륭한 영상미 덕에 이야기는 더욱 선명한 빛을 띠었다. 아주 감각적인 방법으로 인물의 심리상태를 화면 그 자체에 담아낸다. 예컨대, 해질녘 탁 트인 바다나 옥상 위 하늘을 배경으로 깔아 인물의 공허함을 시각화하는 식이다. 푸르르게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벚꽃이 흩날리는 장면은 다시금 함빡 움트는 생기를 표현한다.
작품의 중심인 김남길과 천우희는 흔들림 없는 연기력으로 감정선을 잡아나갔다. 두 배우 모두 출연 제의를 한 차례씩 거절했을 만큼 고민이 많았으나, 이야기와 캐릭터에 대한 호기심을 안고 과감히 도전했다. 이들의 케미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오죽하면 손을 맞잡거나 얼굴을 어루만지는 것만으로 간질간질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정도. 둘이 멜로나 로맨스 호흡을 맞추게 된다면 어떤 모습일지 자연스레 상상해보게 된다.
‘어느날’이라…. 제목의 뜻이 모호하다고? 이 감독의 설명을 들어보면 명쾌해진다.
“흔한 ‘어느날’일지라도 어떤 사람에겐 굉장히 특별한 날일 수 있죠. 여러분이 이 영화를 보실 그 ‘어느날’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 테고요. 기왕이면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수 있는 ‘어느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단 한 분이라도 그런 감정을 느끼신다면 저희가 의도했던 바를 이루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