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정부의 5·18' 세월호, 좌절과 분노의 1073일

입력 2017-03-23 07:55
사진=MBC 뉴스 화면 캡처

박근혜정부가 끝나기를 기다렸던 것일까.

2014년 4월 박 정부 출범 1년2개월 만에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세월호는 박 전 대통령 탄핵 결정 13일 만인 23일에야 물 위로 올라왔다. 차가운 물 속에서 1073일을 기다린 세월호의 모습은 처참했다.

세월호 참사는 박근혜정부의 ‘5·18’이었다.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광주민주화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한 전두환 정권은 임기 내내 5·18과 광주라는 ‘원죄’에 시달리다 끝내 1987년 직선제 개헌으로 국민 앞에 백기투항했다. 내란죄로 법의 심판도 받았다.

세월호 참사 당일 박 전 대통령이 관저에 머물며 올림머리를 하고 보낸 7시간의 악몽은 역시 임기 내내 그를 따라다녔다. 세월호는 이 정부의 무능력, 무대책, 무책임을 뜻하는 대명사가 됐고 결국 탄핵의 단초로 작용했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경기도 안산 단원고 학생 250명 등 총 295명의 사망자와 9명의 미귀가자를 낳은 세월호 참사. 당일 구조 실패에서부터 진상규명 실패와 이어진 인양 시도 실패까지 좌절과 분노의 1073일을 돌아본다.

참혹했던 4월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52분. 전남소방본부 상황실에 단원고 2학년 고(故) 최덕하군이 첫 신고를 했다. “살려주세요”가 첫마디였다. 이어 “배가 기울고 있어요”란 내용이 이어졌다. 30여분 뒤 목포해경 소속 경비정 123함이 현장에 도착했지만 최종 구조된 인원은 172명뿐.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 방송에 착실히 따른 단원고 학생을 포함해 304명이 수장됐다. 단원고 학생의 마지막 카카오톡 메시지는 오전 10시17분 전달됐다. “배가 기울고 있어. 엄마 아빠 보고 싶어 ㅠㅠ”


선수만 남기고 밤새 조명탄을 맞으며 버티던 세월호는 이틀째인 18일 오전 11시50분 물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았다. 오후엔 단원고 수학여행단을 이끌던 강민규 교감이 진도 인근 야산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19일엔 배를 버리고 먼저 탈출한 비정규직 신분의 이준석 선장 등 승무원 3명이 구속됐다. 20일부터는 실종자 가족들이 구조 실패와 책임을 묻기 위해 “청와대에 가겠다”고 나섰다가 진도대교에서 경찰에 막혔다. 이후 3년간 지속될 유족의 애타는 몸부림의 시작이었다.

참사 보름 뒤 침몰 지점에서 2㎞ 떨어진 남동쪽 해상에서 시신이 발견됐다. 사망자 공식집계가 200명을 넘어선 시점이다. 5월 들어선 기상악화와 선체문제로 수색이 중단됐다. 박 대통령은 눈물을 흘리며 해양경찰청을 해체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궁에 빠져든 100일

6월 들어 국회를 중심으로 세월호 침몰사고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가 가동됐다. 정부는 잠적한 청해진 해운 실소유주 의혹의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을 쫓느라 검경은 물론 군부대까지 동원했다. 7월 14일 세월호 유가족들이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을 시작했고, 이튿날 단원고 생존학생들과 학부모들이 국회의사당을 향해 도보 행진을 시작했다.


꼭꼭 숨어있던 유 전 회장은 7월 21일 전남 순천의 한 매실 밭에서 백골 상태의 시신으로 발견됐다. 경찰은 변사체 DNA와 치열 등을 대조한 결과 유씨가 맞다고 공식 발표했다. 세월호 운영과 관련해 불거진 각종 의혹들이 규명되기 어려워졌다.

기상악화 때를 제외하고 세월호 실종자 수색이 계속 됐다. 10월 여성 시신 인양을 끝으로 희망적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11월 11일 정부는 미귀가자 9명을 남겨둔 상태에서 세월호 수색작업 종료를 선언했다.

인양도 못한 채 맞이한 1000일



그해 11월 세월호 특별법이 공포됐고, 해체된 해경 대신 국민안전처가 출범했다. 특별법에 따라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도 구성됐지만 이후 2년 넘게 정부 여당과 온갖 갈등을 빚으며 제대로 된 활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정부는 2015년 1월부터 세월호 인양을 위한 현장조사를 시작했다. 사고 1주기 무렵인 그해 4월 박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세월호 인양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인양 시도는 각종 문제로 여섯 차례나 미뤄졌다.


세월호 인양 없이 참사 1000일을 앞둔 지난 1월, 박 대통령의 탄핵 촉구를 위한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 현장에 생존 단원고 졸업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수많은 촛불 앞 단상에 올라 “저희가 온전히 말씀을 드리기까지 3년이 걸렸다”며 “절대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고 말했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