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침몰 참사로부터 1072일. 그 사이 두 번의 추모기일이 지나갔지만 애도할 수 없었다. 서울 광화문, 경기도 안산, 전남 진도 팽목항에 설치된 희생자 분향소에 영정사진을 놓을 수도 없었다. 세월호에서 아직 돌아오지 못한 9명은 ‘사망자’가 아닌 ‘미수습자’였다.
미망(未忘)의 아픔을 위로받을 수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슬퍼할 수도 없는 미수습자 가족들. 이들에게 2014년 4월 16일 이후의 하루하루는 슬픔조차 허락되지 않은 고통과 침묵의 시간이었다.
세월호 탑승자 중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은 안산 단원고 교사 고창석씨 양승진씨, 학생 남현철군 박영인군 조은화양 허다윤양, 당시 4세 권모양을 살리고 탈출하지 못한 아버지 권재근씨 오빠 권혁규군, 그리고 제주도에서 아들과 살 단꿈에 빠졌던 이영숙씨는 누군가의 부모이고 자식이며 형제였다.
해양수산부가 세월호 시험인양을 시작한 22일 오전 미수습자 가족들은 어선을 타고 바다로 나갔다. 차가운 바다 속에서 3년 가까이 보낸 부모, 아들과 딸, 형제를 어떻게든 품에 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안고 한시라도 빠르게 마중하기 위해서였다.
사고 해역에선 중국 업체 상하이셀비지의 잭킹바지선 두 척이 작업하고 있었다. 해양경찰은 안전을 위해 미수습자 가족과 일부 희생자 유족이 탑승한 어선의 접근을 가로막을 수밖에 없었다. 미수습자 가족들은 멈춘 어선에서 인양작업을 지켜봤다.
미수습자 가족들은 오전 10시 인양작업 시작을 앞두고 팽목항 등대에서 어느 때보다 간절한 염원을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인양 성공을 기원해 달라는 부탁 말고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들은 “세월호 참사 당시 마음을 모았던 국민적 염원이 현장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바다가 잠잠하도록, 작업자들의 안전과 공정이 순조롭게 이뤄지도록, 인양에 성공할 수 있도록 간절한 마음을 보내 달라”며 눈물을 흘렸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