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미국을 방문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무역 문제로 대립했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19일(현지시간)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함께 자유무역을 적극 옹호하고 나섰다.
메르켈 총리는 독일 하노버에서 개막한 세계 최대 정보통신 박람회 세빗(CeBIT) 2017 오프닝 행사에 참석해 “우리는 자유롭고 열린 시장을 원한다”면서 “서로 사물인터넷(IoT)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는 시대에 장벽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강조했다.
트럼프에게 한국과 유럽연합(EU)의 자유무역협정(FTA)을 모범사례로 들며 다자간 국제 무역 회귀를 촉구했던 메르켈은 “미국이 점점 보호주의로 치닫고 있지만 독일은 자유로운 무역과 개방된 시장을 강하게 원하고 있다”며 다시 한번 트럼프를 향해 날을 세웠다.
같은 행사에 함께 참석한 아베 총리도 “일본과 독일 모두 무역과 투자에서 이익을 얻었기 때문에 이만큼 왔다는 공통점이 있다”면서 “자유무역과 투자를 통해 성장한 일본은 독일과 함께 개방된 체제를 지키는 수호자가 되기 원한다”며 메르켈의 말에 힘을 실었다.
두 경제 대국의 공동행보에 대해 메르켈 총리는 “지금처럼 자유무역과 국경 개방, 민주주의적 가치를 두고 많은 사람이 논쟁을 벌이는 시기에 독일과 일본이 다투지 않고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건 긍정적인 신호”라고 평가했다.
두 정상은 일본과 EU의 FTA에 대해서도 조만간 합의에 도달할 것이며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일본은 EU와의 교역량이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나라로 일본과 EU는 2013년부터 FTA 협상을 진행해 오고 있다.
미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은 19일자 기사에서 두 정상이 연이어 트럼프와 만난 이후 자유무역에 대한 공통의 목소리를 낸 점에 주목하며 “세빗 개막 행사에서 메르켈과 아베 중 누구도 트럼프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둘의 발언이)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적 자세를 직접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한편 전날 독일 바덴바덴에서 막을 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에선 미국의 거부로 보호무역주의를 반대한다는 문구가 합의문에서 삭제됐다. 지금껏 G20 경제수장들이 회의 때마다 일관되게 자유무역에 대한 지지를 표명해왔던 것에 비춰볼 때, 트럼프의 보호무역 그림자가 이번 회의에 짙게 드리워졌다는 반응이 나온다.
지난 2015년에서 2016년까지 열린 6차례의 G20 재무장관 회의에선 매번 공동선언문을 통해 “모든 형태의 보호무역주의를 배격한다”는 합의를 도출해 온 바 있다.
대신 올해 공동선언문에는 “경제 성장 추구에 있어 과도한 글로벌 불균형을 줄이고, 포용성과 공정성을 증대시키며,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해 온 우리는 경제에서 무역이 차지하는 기여도를 강화하고 있다”는 모호한 표현이 담겼다.
미국은 한술 더 떠 세계무역기구(WTO) 협정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대한 재검토 주장을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스티븐 므누신 미국 재무장관은 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다자간 무역협정의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므누신 장관은 “미국은 자유무역을 바란다. 하지만 무역은 공정하고 균형이 잡혀야 한다. 이번 결과에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고 밝혔다.
하지만 외신들은 므누신이 G20 재무장관 회의 데뷔 무대에서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였지만, 막상 이번 회의에서 미국의 무역정책을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고 꼬집었다.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에 “므누신 장관은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주의라는 G20이 당면한 가장 긴급한 현안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결정할 어떤 권한도 없어보였다”면서 “우리는 교착상태에 빠졌다”고 일축했다. FT는 미국이 자유무역에 대한 분명한 의지 표명을 거부한 것을 두고 “위험한 길로 가는 첫걸음으로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오는 7월 함부르크에서 G20 정상회의가 예정된 상황에서 미국을 원래의 자유무역 기조로 되돌릴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다른 G20 국가들이 므누신 설득에 실패한 상황에서, 트럼프를 설득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우려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구성찬 기자 ichthu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