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영 칼럼]시저와 다윗

입력 2017-03-20 17:16

시저와 다윗은 둘 다 가장 사랑하는 자식으로부터 배신을 당했다. 시저는 목숨을 잃었고, 다윗은 목숨을 구걸하며 먼 길을 떠나게 됐다.


브루투스는 시저가 가장 신뢰했으며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해 두었던, 제일 사랑한 양아들이었다. 그토록 믿었던 아들에게 배신당해 최후를 맞는 시저의 마음을 셰익스피어는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명대사로 대변했고, 이 외마디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다윗 또한 사랑했던 아들 압살롬의 배반으로 궁전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 자신의 모사와 신하들로부터도 배반을 당했으며, 그가 사랑한 후궁들은 대낮에 아들 압살롬에 의해 강간을 당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배반하는 사례는 인류 역사상 너무나 많다. 한국의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국민들을 굶주림으로부터 해방시켰고, 단 20여 년 만에 한국 경제를 근대화의 대열로 끌어올린 공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독재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그가 가장 사랑하고 권력을 나누어준 최측근 김재규로부터 살해당했다. 김재규는 “민주주의를 위해”라는 말을 남겼다.

브루투스도 로마의 민주주의를 위해 독재자를 죽였다고 했다. “나는 시저보다 로마를 사랑한다”는 말을 남겼지만 브루투스 역시 불행한 최후를 맞게 된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 또한 자신의 모든 제자 중 제일 학식이 높고 똑똑하다는 평을 듣던 가룟 유다에게 배신을 당해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돌아가신 역사도 우리는 무척 잘 알고 있다.

배신자 가룟 유다는 결국 자살해 그의 창자가 길거리에 나뒹굴었고, 브루투스 또한 전쟁에 패해 자살함으로써 그의 명을 다하지 못했다. 

압살롬은 그가 가장 사랑하던 길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전쟁 중 나뭇가지에 걸리는 바람에 비참한 죽음을 맞았고, 김재규 역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배반이 가져오는 결말은 오늘날에도 눈여겨볼 만한 가치가 있다.

최근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측근 중의 측근이라고 여겼던 사람들에게 “배신의 정치를 중지하라”고 말했다가 결국 탄핵의 올무에 걸렸다. 본인은 참으로 억울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정치 세계라는 것이 순수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늦게 깨달은 모양이다.

나 또한 이와 비슷한 배반을 여러 번 겪었다. 그때마다 무척 힘이 들고 고통스러웠으나, 위기의 순간을 모두 이겨내고 다시 용기를 얻어 사업을 재개해왔다. 한창 힘들었을 때엔 온몸에 대상포진이 생겨 그 고통은 말로 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이런 시련들을 이겨낸 것은 기도의 힘이었고 성령 하나님의 보호 덕분이었다는 확신이 있다. 이 사례들이 믿음의 증거가 되고, 이를 통해 더욱 큰 믿음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시저와 박정희 전 대통령, 그리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우는 의지할 데가 없었기에 실패한 사례다. 그러나 다윗과 예수님의 경우는 다르다. 이들은 결국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 이유는 다윗과 예수님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으며, 하나님이 승리의 길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아무리 음침한 골짜기를 걸을지라도, 하나님의 보호가 함께 한다면 어떤 적들의 음모나 공격도 무서워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면, 아무리 험한 인생길도 무섭지 않을 것이며 승리의 길로 인도될 것이다.

그리스도께 의지하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승리의 길이다. 그를 의지하고 그와 함께 하는 길을 가도록 성령 하나님께 간구하자. 

<한국유나이트문화재단 이사장, 갈렙바이블아카데미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