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영 기자의 안녕? 나사로] 나와 같다면

입력 2017-03-17 15:35
최근 취재를 위해 한 뇌병변 장애아동의 집을 찾았다. 주인공은 침대에 누운 채 ㄱ자로 꺾인 손목을 들어 힘겹게 인사를 전했다. 바닷가로 떠난 가족여행에서 사고를 당한 아이는 기적적으로 의식을 찾았지만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장애를 안은 채 살아가야 했다. 아이의 어머니는 장애인이 된 아들을 위해 삶을 던졌다. 숱한 생사의 갈림길에서 두 사람을 버티게 해준 건 기도였다. 사고 당한 아들을 붙든 채 응급실로 향하는 구급차 안, 몇 시간이 걸릴지 모를 대수술을 앞두고 수술실로 옮겨지는 이동식 침대 위, 갑작스런 발작으로 인해 고통스러워 나뒹굴던 집의 안과 밖 등 모든 곳이 눈물어린 기도 처소였다.


두 시간 가까이 머무는 동안 아이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간간이 소리 없이 웃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헤어지기 전, 아들을 위한 기도를 요청했다. 어머니는 익숙하게 아들의 손을 잡았다. ㄱ자로 꺾인 손목은 끊임없이 진동했다. 아들의 건강과 가정의 평안을 기원하는 기도가 시작됐다. 그때 어머니의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분명 아무렇지 않았던 손목이 ㄱ자로 꺾여 있었다. 기도를 마친 뒤 혹시 손목이 불편한지 슬며시 물었다. 가슴 먹먹해지는 대답이 돌아왔다.

“별거 아녜요. 그냥 아들이 ‘자기 손목만 이런가’라고 상처받지 않았으면 해서 손잡고 기도할 땐 이렇게….”

언젠가 인터넷에서 봤던 기사와 사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암에 걸린 친구가 홀로 외로워하지 않도록 다 같이 머리를 깎은 친구들, 휠체어를 타는 지체장애인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저마다 집에서 바퀴 달린 의자를 가져와 농구하는 모습을 보여 준 이웃들. 한 무리의 대머리 소년들이 모여 있는 사진 위엔 ‘이 가운데 몸이 아픈 사람은 있지만 마음이 아픈 사람은 없습니다’란 제목이 붙어 있었다.

비장애인과 조금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장애인이 장애를 받아들이는 첫 관문이다. 언젠가는 통과해야할 아픔의 터널이다. 일상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불편함은 육체적인 고됨과 정신적 침체로 이어진다. 여기에 일부 비장애인들의 잘못된 시선까지 더해지면 장애인들은 ‘세상에 내가 설 자리가 없다’는 비관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른 이들도 나와 같다’는 가정이 생기면 용기가 움튼다. 칠흑같이 어두운 터널 끝에서 희망의 빛을 발견하게 된다. 장애아동의 집을 나서는 순간, 꺾인 손목보다 흰 치아를 드러낸 채 엄마를 향해 지어보이던 미소가 먼저 떠올랐던 이유는 그 아이가 발견한 희망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꺾인 손목이 아들의 마음속에 심어 준 희망이자 용기다.

나사로가 죽은 지 4일 만에 베다니에 도착한 예수님은 썩어 냄새가 나는 그를 소생시킴으로써 죽은 자도 능히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셨다(요 11:1~44). 악한 부자 비유에 등장하는 나사로는 부스럼병(한센병)으로 고통 받으며 부자의 집 대문 앞에서 버려지는 음식으로 연명하다 죽음을 맞았지만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는 복을 받았다(눅 16:19~31). 나사로는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뜻을 갖고 있다. 사람들이 장애와 비장애를 가르던 인식을 허물고 ‘나와 같음’을 표현할 수 있었던 건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최기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