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문 패권주의. '문재인이냐 아니냐'의 구도로 가고 있는 이번 대선에서 가장 뜨거운 키워드 중 하나다. 친문 진영이 친박처럼 세력을 형성해 권력을 가지려 한다는 주장. "문재인은 안 된다"는 이들의 논리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친문 진영은 결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친문은 있어도 패권은 없다"고 여러 차례 반박했지만 논란은 사그러들 기미가 없다. 친문 패권주의, 과연 존재하는가. 실체는 무엇인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원한 비서실장’으로 여겨졌던 문 전 대표는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다. 그해 대선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당에서 유리된 채 시민사회 그룹의 지지에만 기댔다가 실패했다는 평가마저 나왔다. 문 전 대표는 2015년 2·8전당대회에서 당대표에 선출되며 ‘친문 시대’를 열었다. ‘이기는 정당’을 내걸고 나선 그는 2012년과 달리 민주당을 통한 집권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이 시점부터 친문·반문 그룹 간 주도권 싸움도 격화됐다.
한 반문 의원은 16일 “2015년은 차기 대선을 향한 문 전 대표의 로드맵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라며 “민주당이 악전고투해 이뤄놓은 역사에 친노·친문이 끼어들기 시작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한 친문 의원은 “당의 혁신을 위해 모든 걸 양보하고 또 양보했다”며 “친문 의원이야 있지만 패권주의 누명을 씌우는 건 중상모략”이라고 반박했다.
반문 의원들은 지난해 8·27 전당대회에서 친문의 당 지도부 ‘싹쓸이’를 대표적인 패권주의 사례로 꼽는다. 정치경력이 일천한 사람들마저 문 전 대표가 영입했다는 이유로 주요 당직에 올랐다는 비판이다. 이들은 안철수·김종인 등 비문 개혁세력의 소모품화, 친문 핵심세력 중심의 배타적인 당·캠프 운영, 2012년 총선의 공천 담합 의혹, 2015년 4·29 재보궐 참패 후에도 책임지지 않는 모습 등도 지목했다. ‘달레반(문재인+탈레반)’이라 불리는 열성 지지층의 ‘문자 테러’ 등은 비문 의원의 당내 언로 폐쇄용이라는 의심도 일게 했다.
친문 그룹은 비문의 이런 지적이 개혁 작업에 반대하는 정치 기득권의 마타도어라며 반론을 제기한다. 문 전 대표는 2015년 당대표 선출 이후 계파갈등을 불식하기 위해 탕평인사에 공을 쏟았고, 친문 측근 인사들을 당직에서 대부분 배제했으며, 경쟁자였던 박지원계 인사들도 주요 보직에 기용했다는 주장이다. 그럼에도 반문 의원들은 사퇴 요구, 공천권 나눠먹기 등을 요구하며 문 전 대표를 흔들었고, 문 전 대표는 결국 ‘김상곤 혁신위’에 당권을 연계하는 승부수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당내 기득권 세력이 지속적인 당 혁신 작업을 ‘패권주의’로 몰아붙였다는 것이다.
친문 인사들은 지난해 4·13 총선에서 이해찬 노영민 강기정 등 친문 측근들이 대거 공천에서 탈락한 것도 패권주의가 허상이라는 근거라고 밝혔다. 한 친문 의원은 “호남홀대론 등 전혀 사실이 아닌 것들도 사실로 둔갑시켜 마타도어로 사용했다”고 비판했다.
◇"친문 패권주의는 있다"… 8가지 장면
더불어민주당을 거쳐 간 많은 인사들은 “친문 패권주의는 실재한다”며 ‘보이지 않는 벽’을 집중 성토했다. 19대 국회에서 당 지도부를 지낸 뒤 한 전 의원은 16일 “친문 패권주의의 핵심은 권력욕”이라며 “친문이 적폐청산을 주장하지만 패권주의 자체가 정치권의 적폐”라고 강도높게 비판했다.
친문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은 주로 자기 진영만 챙기는 이기적 행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친문의 모태인 ‘친노 그룹’이 배타성으로 비판받았던 것과 유사한 논리다.
2012년 총선 공천과정에서 불거졌던 ‘공천 담합’ 논란은 친노·친문을 관통하는 키워드인 편가르기의 대표 사례로 통한다. 당시 친노 진영은 당내 386세력과 손잡고 주류로 자리잡은 상태였다. 비주류 의원들은 당시 공천심사위원회 간사였던 백원우 전 의원 등의 공천전횡 정황을 강력하게 성토했다.
당시 공천을 신청했던 한 원외인사는 통화에서 “공천 초기 친노 의원들은 자기 지역구를 먼저 단수공천했다. 이후 ‘2배수’ 컷오프 지역구에도 여론조사 3~4위인 친노 후보를 통과시키는 등 비합리적인 일들이 많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장세환·조경태 의원은 “비주류와 지역 배려는 흔적조차 안 보이는 특정 계파·지역을 위한 불균형 인사”라고 반발했다.
지난해 8월 전당대회에선 친문 주류의 지도부 장악이 도마에 올랐다. 친문 진영의 지원을 받은 추미애 대표는 절반을 넘는 득표로 당선됐다. 선출직 3명(여성·노인·청년)과 권역별 5명 등 최고위원 모두 친문 인사들로 채워졌다.
비주류 측은 이 때 온라인 당원을 중심으로 친문 후보들에 대한 조직적인 표 몰아주기가 이뤄졌다고 지적했다. 추 대표를 포함한 선출직 당선자들은 모두 55% 안팎의 동일한 득표율을 얻었다. 팟캐스트와 SNS 등을 활용한 일사분란한 ‘오더 투표’였다는 것이다.
8·27 전당대회부터 바뀐 권역별 최고위원 선출방식도 당권 편중 논란을 부채질했다. 시·도당 위원장들이 호선으로 최고위원을 선출토록 했는데, 이미 친문이 시·당위원장을 장악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노무현 청와대 행정관을 지낸 한 인사는 “과거 제왕적 총재 소리를 들었던 DJ·YS 시절에도 당 지도부에 비주류를 안배했다. 하지만 현재 민주당은 친문 카르텔 밖의 사람들이 철저하게 배제되는 구조”라고 비판했다.
‘이너서클’ 중심의 배타적 당 운영도 빈번히 지적된다. 노무현 청와대 출신이나 친소 관계에 따른 회전문 인사가 만연하다는 게 반문 측의 비판이다. 한 수도권 중진 의원은 “캠프 내 의원그룹이 30명 정도라면 실제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건 친문 핵심의원 10명 안쪽”이라며 “탕평을 내세워 영입한 호남·전직 의원들도 껍데기 직함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최근 김종인 전 비대위 대표의 탈당으로 불거진 ‘뺄셈 정치’ 논란도 맥락은 비슷하다. 친문 패권 논란 등 위기 상황에서 돌파구로 모셔온 영입 인사들을 매번 소모품 취급했다는 것이다. 안철수 전 국민의당 공동대표의 탈당이나 김한길 전 대표·박영선 전 원내대표 등 비주류 지도부 흔들기가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된다. 2014년 7·30 재보선 패배 당시 안철수·김한길 공동대표는 동반 사퇴로 내몰렸다. 하지만 2015년 4·29 재보선 전패에도 불구하고 문 전 대표 등 친문 지도부는 혁신위를 내세워 유임됐다. 비문 의원들은 ‘책임정치 실종’과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성향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주장했다.
◇"친문 패권주의는 없다"… 8가지 장면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친문(친문재인) 패권주의’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친문 패권은 없다”고 단언했다. 문 전 대표 측 인사들은 16일 “친문은 있다. 그러나 패권 행사는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친문 진영의 대표적 반박 논리는 ‘탕평 인사’다. 문 전 대표는 2015년 2·8 전당대회에서 ‘친노(친노무현) 당직 배제’를 선언했다. 이 때문에 당시 친노 그룹에서는 “문재인이 언제부터 친노였다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는 거친 불만 토로까지 나왔다. 그럼에도 문 전 대표는 지도부 구성에서 친문 인사를 배제했다. 최재성(총무본부장) 강기정(정책위의장) 전 의원 등 일부만 당직에 기용됐다. 한 핵심 측근은 “문 전 대표는 대표 시절 측근을 써 본 적이 없다. 심지어 이종걸 당시 원내대표 요구로 강 전 의원이 정책위의장에서 물러났다. 어떻게 패권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현 대선캠프 역시 노영민 전 의원(조직본부장)을 제외한 친문 인사 대부분이 후위로 물러나 있는 상태다.
문 전 대표는 입버릇처럼 “친문 패권이 있다면 당 대표 시절 그렇게 흔들렸겠느냐”고 되묻는다. 실제 2015년 ‘문재인 지도부’는 새정치민주연합(민주당 전신) 사령탑에 오른 지 두 달도 안 돼 극심한 흔들기에 시달렸다. 2015년 4·29 재보선에서 전패했기 때문이다. 문 전 대표는 ‘김상곤 혁신위원회’를 띄우며 수성에 나섰지만, 5개월 만에 ‘재신임 승부수’를 띄우는 상태까지 내몰렸다. 결국 분당사태가 발생했고 문 전 대표는 임기(2년)를 절반도 채우지 못한 채 물러나야 했다.
친문 인사들은 지난해 4·13 총선 공천에서 대거 탈락했다. 친노 좌장 이해찬 의원과 노영민 김현 정청래 강기정 전 의원 등 친문 핵심 인사들이 줄줄이 ‘컷오프’ 됐다. 당시 공천에 배제됐던 한 친문 인사는 “패권이 있었다면 친문이라는 이유로 공천학살을 당했겠느냐”고 성토했다.
문 전 대표가 안으로는 엄격하고, 밖으로는 포용적 입장을 취했다는 점도 주요 반박 사례다. 문 전 대표 시절 자녀 취업청탁 의혹을 받았던 윤후덕 의원, ‘비노 세작’ 발언을 한 김경협 의원, 의원실에 카드기를 설치해 시집을 판매한 노영민 전 의원 등은 당 윤리심판원의 중징계를 받았다. 반면 당권 경쟁상대였던 박지원 당시 후보 측근인 김영록 이윤석 전 의원은 각각 수석부대변인과 조직본부장에 임명됐다. 문 전 대표 측 관계자는 “야당 역사에서 우리처럼 경쟁상대를 중용한 그룹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친문계 내부에서는 패권주의 논란이 야권 기득권 정치세력의 마타도어(흑색선전)라는 시선도 강하다. 2003년 대북송금 특검은 여야 합의로 진행된 것이므로 문 전 대표가 기획한 것이 아니고, 역대 호남 인사를 가장 많이 기용한 노무현정부에 호남홀대론을 제기하는 것 등은 모두 허위사실이라는 것이다. 한 친문 인사는 “호남 정치인을 중심으로 근거 없는 마타도어가 10년째 계속되고 있다”고 분개했다.
최근 비주류·개헌파에 ‘문자폭탄’ ‘18원 후원금’을 보내 논란이 된 이른바 ‘문빠’(문재인 열성지지자)에 대해서도 친문 진영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문빠는 노 전 대통령 지지층이 자연스럽게 넘어왔을 뿐 문 전 대표 측이 조직한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캠프 핵심 관계자는 “우리가 그들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정권교체의 수단으로 우리를 선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준구 최승욱 정건희 기자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