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요즘 ‘바나나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난해 10월 베이징을 방문한 뒤 필리핀 바나나의 중국 수출이 급증하자 이를 외교 성과로 내세웠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취임 후 줄곧 미국과 불편한 관계를 이어왔다. 지난해 9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오바마가 마약과의 전쟁에 문제를 제기하면 욕을 해주겠다”고 막말을 하는가 하면, “군사훈련을 미국이 아닌 중국과 함께 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이렇게 미국보다 중국을 가까이하는 외교노선이 옳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바나나’를 꼽은 것이다. 그는 지난주 “중국이 필리핀 경제에 힘을 주고 있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바나나는 중국과 필리핀의 분쟁을 상징하는 과일이었다. 2012년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이 벌어졌다. 스카보로섬(중국명 황옌다오)에서 중국 어선을 단속하는 필리핀 전함과 중국 초계함이 대치했다. 중국은 필리핀에 “분수를 알라”며 거친 발언을 쏟아냈고, 경제 보복을 시작했다. 그 수단 중 하나가 바나나였다. 필리핀산 바나나에서 해충이 발견됐다는 이유를 들어 필리핀 바나나 수입을 사실상 금지했다.
필리핀은 2013년 국제중재재판소에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을 제기했다. 재판소는 중국의 영유권 주장에 근거가 없다며 필리핀의 승소를 선고했다. 중국은 패소 후에도 바나나 수입 금지를 유지하다 지난해 6월 두테르테 대통령이 취임한 뒤에야 풀어줬다. 두테르테가 미국을 멀리하는 노선을 택하자 손을 내밀어준 것이다. 이제 바나나는 중국과 필리핀의 우호관계를 상징하는 과일로 돌변했다.
전기차 배터리, 스마트폰, 풍력발전 등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원료 ‘희토류’는 ‘희귀한 금속 원소'란 뜻을 갖고 있다. 세계 희토류 생산량의 90% 이상을 중국이 차지한다. 각종 첨단 산업을 육성하려면 안정적인 공급원을 확보해야 하고, 그러려면 중국에서 희토류를 꾸준히 수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희토류를 중국은 종종 다른 나라에 대한 ‘보복 수단’으로 활용했다. 2010년 일본이 제대로 당했다.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영유권 분쟁이 지속돼온 상황에서 당시 일본은 열도 주변에 들어온 중국 어선의 선장을 전격 체포했다. 중국 정부가 일본 대사를 여러 차례 불러 석방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중국 선장을 일본 법정에 세워 일본 법에 따라 재판을 받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센카쿠 열도가 일본 법률이 미치는 일본 영토임이 분명히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자 중국은 일본에 대한 희토류 수출을 전면 금지했다. 당시 일본은 자국 산업에 필요한 희토류의 85%를 중국산에 의지하고 있었다. 제조업이 멈춰 설 상황이 되자 일본은 하루 만에 백기를 들고 중국 선장을 석방했다. 간 나오토 당시 총리의 지지율은 15%까지 떨어졌다. 이후 일본은 희토류 구매선 다변화를 꾀해 중국 의존도를 획기적으로 낮췄지만 뒤늦은 조치였다.
필리핀에는 바나나, 일본에는 희토류로 보복에 나섰던 중국이 한국을 상대로는 관광을 무기로 택했다. 중국 당국이 ‘소비자의 날’을 맞아 한국 단체관광을 금지한 15일 제주공항으로 들어온 중국인은 1000명 미만으로 급감했다. 외환위기 여파에 시달리던 8년 전 수준으로 중국인 관광객이 급감한 것이다. 중국에서 출항하는 크루즈의 국내 기항 일정은 연말까지 182항차 36만명이 취소됐다. 카페리 단체관광객 7만1천명도 예약을 취소했다.
‘소비자의 날’은 중국 관영매체들이 기업이나 제품의 문제점을 고발해 품질을 개선하자는 취지로 제정한 것이다. 이날을 택해 한국 관광을 금지했다는 것은 한국이 ‘소비자 블랙리스트’에 오른 상징성을 갖는다. 장기화될 경우 중국 의존도가 절대적인 한국 관광산업은 크게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문제는 중국의 사드 보복에서 관광이 진짜 무기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필리핀에 바나나 카드를 꺼내기 전, 일본에 희토류 수출을 금지하기 전에도 중국은 관광 제한 조치를 취했었다. 중국의 최대 자원인 인구는 가장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카드다. 이를 사용하다 먹혀들지 않을 때 더 치명적인 무기를 꺼내곤 했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