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고가 끝나고 보니 봄이었다. 우리는 겨울이 없었다.”(헌법재판소 연구관)
92일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에 투입된 헌재 연구관들은 계절의 변화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사건 심리에 매달렸다. 전직 대통령 비리와는 구조가 다른 국정농단 사건을 두고 법률적으로 상상 가능한 모든 변수와 논리를 점검했다. 국가원수의 공백이라는 국가적 비상사태를 오래 방치할 수 없다는 공감대 아래 속도전을 펼쳤다.
미증유의 사건
헌재 관계자는 12일 이번 박근혜 전 대농령 탄핵 심판 사건을 "신종 바이러스 같았다"고 평가했다. 기존의 전형적인 대통령 권력비리와는 구조가 달랐다는 설명이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국정농단이라는 새로운 권력비리의 구도를 자세히 짚었다. 우선 박 전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지속적이고 광범위하게 이뤄진 최순실씨의 국정개입을 지적했다. 인사와 국무회의 자료까지 청와대의 각종 기밀자료가 최씨 손에 건네졌다. 또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을 필두로 청와대가 미르·K스포츠재단의 기획 설립을 지시하고,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원 대기업이 실행자로 나섰다. 최씨는 자신의 다른 회사를 앞세워 용역계약을 따내는 식으로 이권을 챙겼다.
헌재는 정부와 전경련이 전방위로 움직인 경위에 주목했다. 최씨라는 사인(私人)의 이익을 위해 청와대부터 기업까지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자는 박 전 대통령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오래 전부터 인연을 맺어왔던 박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최씨의 이권을 위해 청와대가 나설 이유도 불분명했다. “최씨의 국정농단과 이권개입을 몰랐다”는 박 전 대통령 측의 주장은 이 대목에서 힘을 잃었다.
“출혈없이 끝내야 할 수술이었다”
미증유의 사건을 받아든 헌재는 한 가지 공감대 위에서 사건을 심리했다고 한다. 어떤 결론이 나오든 속도가 중요하다는 점이었다. 헌재 관계자는 “피를 흘리지 않고 살점을 베어내라는 베니스의 상인 샤일록을 향한 요구처럼 출혈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심리가 지연돼선 안 된다는 점은 확고했다”고 말했다. 대통령 부재라는 국가적 비상상황을 신속히 해소하는 것이 탄핵심판의 본질 중 하나라고 판단했다.
김평우 변호사 등 박 전 대통령 측 대리인단이 줄기차게 제기한 절차적 문제에 대한 검토·연구도 비중 있게 진행됐다. 자칫 신속한 재판을 위해 절차적 흠결을 등한시했다는 지적을 원천봉쇄하겠다는 의지였다.
연구관들은 탄핵심판 사례도 분석했다. 가장 최근에 탄핵된 브라질의 지우마 호세프 전 대통령부터 2009년 미국 법관 사무엘 켄트 등의 분석까지 광범위한 작업이었다. 이 관계자는 “국가 핵심직무의 공백상황이 시작되면 국가적 비용이 발생한다”며 “결론은 달라도 탄핵심판이 시작된 이상 신속하게 진행됐다는 점에서는 동일했다”고 설명했다. 2004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때도 탄핵심판 접수부터 결론까지 걸린 기간은 63일에 불과했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