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퇴임을 앞둔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선고 직전까지 고심을 거듭했다. 당일 오전에도 헌재 연구관들이 다듬었던 결정요지서 초안을 붙들고 다시 첨삭을 반복했다. 이 권한대행이 잊은 채 꽂고 나왔던 ‘헤어롤’은 희화화의 대상이 아닌 92일간 헌재가 쏟은 고민의 상징이 됐다. 이 권한대행과 재판관, 헌재 연구관들의 땀이 밴 결정요지서는 헌재의 공식기록물로 보존될 예정이다.
박 전 대통령 탄핵선고가 있었던 지난 10일, 오전 7시50분에 출근한 이 권한대행의 책상에는 결정요지서 초안이 올려져 있었다. 이 초안은 헌재 연구관들이 이날 새벽 3시까지 거듭한 검토의 결과물이었다. 연구관들은 어색한 표현이나 오탈자가 없는지 여러 차례 수정작업을 거친 것으로 알려졌다. 중요한 의미를 가진 문구 옆에는 포스트잇을 붙여 부연설명을 넣어둘 정도로 공을 들였다. 차를 가지고 퇴근하려던 연구관 중 일부는 그날 새벽부터 비상시를 대비해 세워진 경찰의 통제선에 막혀 다시 헌재로 돌아가야 했다는 얘기도 있다.
이 권한대행은 이렇게 만들어진 초안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엄중한 시국을 표현할 더 적합한 표현을 직접 적어 넣었다. 수정이 이뤄진 문장 옆에는 일일이 이 권한대행의 친필 사인이 들어갔다. 재판장이 직접 수정했다는 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였다.
또 결정요지서를 낭독하면서 숨을 골라야 할 부분과 강조해서 읽어야 할 부분도 직접 표시했다고 한다. 선고 직전에야 진행됐던 8인 재판관 평결 결과를 미리 알 수 없었던 만큼 탈고(脫稿) 역시 각 버전별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이 권한대행의 긴장감 넘치면서도 차분하고 힘 있는 결정문 낭독이 긴 여운을 남기고 회자되는 것도 이런 과정의 결과였다. “헌법은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국가기관의 존립근거이고, 국민은 그런 헌법을 만들어 내는 힘의 원천”, “국론분열과 혼란이 종식되기를 바란다”는 문구 등에 이 권한대행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권한대행이 10일 오전 11시21분 낭독을 마친 헌재 결정요지서는 헌재가 다시 회수해 공식기록물로 보관할 방침이다. 또 92일간 헌재가 달려온 여정은 백서 형태로 기록된다.
이 권한대행이 퇴임하면서 헌재는 당분간 ‘7인 재판관 체제’로 운영될 전망이다. 헌재소장 권한대행은 7인 재판관 중 가장 선임인 김이수 재판관이 맡게 된다. 양승태 대법원장 추천으로 이선애 변호사가 이 권한대행의 후임으로 지명됐지만 국회 인사 청문회 등 절차가 남았다.
7인 체제는 헌법재판소법이 규정하는 최소 정족수다. 헌재는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후임인선 절차가 이뤄져 일부 재판관 공석사태가 해소되길 기대하는 분위기다. 박한철 전 헌재소장의 퇴임으로 공백인 헌재소장 선임은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나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