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 겸 연출가 고선웅(49). 수많은 화제작을 발표하며 공연계의 사랑을 받아온 그는 최근 대중적으로도 유명세를 탔다. 지난 1월 초 국회 청문회에서 그가 5.18 광주민주화항쟁을 다룬 연극 ‘푸르른 날에’로 블랙리스트에 올랐었지만, 지난해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보고 감동받은 박민권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이 블랙리스트에서 그를 제외해 달라고 청와대에 요청해 빠진 것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1월 18일~2월 12일 명동예술극장에서 재공연한 국립극단의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티켓 구하기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의 신작인 창극 ‘흥보씨’가 4월 5~16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무대에 오른다. ‘변강쇠 점 찍고 옹녀’로 좋은 궁합을 보여줬던 국립창극단과의 두 번째 작업이다. 7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제작발표회는 그동안 베일에 싸였던 ‘흥보씨’를 소개하는 자리였다.
‘흥보씨’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판소리 ‘흥보가’를 원작으로 했다. 중국 고전 ‘조씨고아’를 원작으로 한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판소리계 소설 ‘변강쇠가’를 원작으로 한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의 대성공 이후 고전 비틀기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그는 이번에도 ‘흥보가’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번엔 비틀기가 아니라 창작에 가까운 수준이다.
그는 “‘흥보가’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인데다 드라마가 단순한 편이다. 게다가 내 경우엔 원작의 하이라이트인 ‘박 타는 대목’이 유난히 끌리지 않는다. 그래서 ‘선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는 살리되 요즘 관객도 공감할 수 있도록 작품을 새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면서 “예전엔 ‘손해 좀 보면서 착하게 살아라’는 말을 듣곤 했지만 요즘엔 ‘착하게 살면 손해 본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흥보씨’를 통해 요즘 시대에도 선함 그 자체가 스스로에게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번 작품엔 인생에 대한 평소 제 철학이 담겨있다”고 설명했다.
국립창극단의 ‘흥보씨’는 흥보와 놀보의 출생에 얽힌 비밀로 시작한다. 원래는 흥보가 형이고 놀보가 동생이었지만 어떤 일을 계기로 둘의 서열이 뒤바뀌었다는 설정이다. 선과 악으로 상징되는 형제의 성격은 원작과 동일하지만 부모, 처자식 등 주변인물들의 이야기가 더욱 풍성해졌을 뿐만 아니라 ‘말하는 호랑이’ 등 새로운 캐릭터들도 다양하게 등장한다.
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흥보가’를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내는데 당대 최고 이야기꾼 고선웅 씨만한 사람이 없다”면서 “‘변강쇠 점 찍고 옹녀’의 대본이 처음 나왔을 때 너무 재밌어서 단번에 읽었는데, ‘흥보씨’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이어 “새로운 이야기지만 기존 ‘흥보가’의 눈대목(판소리의 중요한 대목)을 다 녹여낸 필력은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고 토로했다.
‘흥보씨’에서 고선웅의 음악 파트너로는 배우이자 소리꾼, 인디밴드 보컬로도 활동하는 이자람이 나섰다. 이자람은 다섯 바탕 판소리를 모두 완창했을 뿐만 아니라 ‘사천가’ ‘억척가’ 등 창작판소리로 국내외에서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이번에 작창·작곡·음악감독을 맡은 이자람은 판소리 ‘흥보가’의 원형을 토대로 하면서도 자유롭게 변주하고 새로운 사운드를 입혀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이자람은 “2005년 국립창극단의 ‘춘향’에 배우로 출연한 적은 있지만 창작자로서는 이번이 처음이다”면서 “고선웅 연출이나 국립창극단 단원들과 처음 호흡을 맞추지만 팀워크가 매우 좋아서 작업이 즐겁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작품에는 전통과 현대의 균형을 맞춰주면서도 감각적인 사운드가 필요한 것 같다”면서도 “다만 내가 맡은 작창과 작곡의 목표는 새로움 자체가 아니라 것은 대본에 충실하면서 배우들의 말을 잘 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고선웅은 이자람에 대해 “텍스트 분석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고 칭찬했다.
한편 ‘흥보씨’에는 최근 국립창극단에서 맹활약하는 20~30대 남자 단원들이 대거 주역으로 출연할 예정이다. 흥보 역에 김준수, 놀보 역에 최호성, 마당쇠 역에 최용석, 원님 역에 이광복, 제비 역에 유태평양이 맡았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