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라이더’ 지금 여기 우리, 잘 살고 있나요? [리뷰]

입력 2017-02-25 19:04 수정 2017-02-25 19:09

삶은 참으로 얄궂다. 분명 최선을 다했는데 매번 후회가 남는다. 열심히 사는 게 다가 아니란다. 정작 중요한 건 따로 있다고들 하는데 그게 뭔지 깨닫기는 쉽지 않다. 다 지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아차’ 싶은, 그런 게 인생인가 보다.

영화 ‘싱글라이더’는 고된 삶에 치여 사는 한 가장의 모습을 비춘다. 주인공 재훈(이병헌)의 숨 막히는 나날로 들어간다. 증권사 지점장인 재훈은 교통체증을 뚫고 힘겹게 출근한다. 그런데 회사는 부실채권 문제가 터져 아수라장이 돼있다. 상사에게 따져 물어보지만 “너도 알면서 설마 설마했던 거 아니냐”는 꾸짖음만 돌아온다. 재훈은 죄책감에 휩싸여 눈물만 글썽인다.

다음날 회사에는 성난 고객들이 몰려와 울분을 토해낸다. 재훈은 앞장서서 무릎을 꿇고 앉아 모든 비난을 받아낸다. 그가 “직원들을 대표해서 사과드리겠다”고 입을 떼는 순간 어디선가 투박한 손이 날아온다. 귀싸대기를 얻어맞은 재훈은 속절없이 나자빠진다. 다시 몸을 고쳐 세우고 안경을 바로 쓰는 그의 얼굴에는 침통함이 그득하다.

집으로 돌아온 재훈은 호주에 있는 어린 아들이 보내온 생일카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빠 생일 축하해요.’ 재훈은 아내(공효진)와 아이를 호주로 보내고 홀로 생활하는 기러기 아빠. 2년간 일에만 매달리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내 한몸 고생스러울지라도 아내와 아이는 아무 탈 없이 영어를 배우며 잘 지내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버텼다. 모든 기력을 소진해버린 그는 가족의 품이 그리워진다.


즉흥적으로 호주행 비행기 티켓을 끊은 재훈은 옷 갈아입을 정신도 없이 정장과 구두 차림으로 호주에 도착했다. 손에 대충 적은 주소에 의지해 아내와 아들이 지내는 집으로 찾아간다. 한데 예상치 못한 광경을 마주한다. 아내가 이상하다. 옆집에 사는 호주인 남성 크리스과 보통 사이가 아닌 듯하다. 포기했던 바이올린도 다시 잡았다. 아들은 크리스를 새 아빠마냥 따른다. 재훈은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내내 주변을 맴돈다.

오로지 가족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재훈은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놓쳤던 것이 무엇인지 알아챈다. 화가 나기도, 슬프기도 하지만 되돌리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호주 워홀러 진아(소희)를 만나며 깨달음은 한층 짙어진다. 영화는 걷고 또 걷는 재훈의 움직임을 가만히 따라간다. 힘겨운 발걸음, 처진 어깨, 쓸쓸한 뒷모습, 그리고 공허한 얼굴.

이병헌은 어떤 경지를 넘어선 연기력으로 재훈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해낸다. 별다른 대사 없이도 완벽한 심정적 공감을 일으키는 것이다. 비슷한 장면의 연속, 그러나 이병헌의 눈빛 표정 동작은 매 순간 다른 이야기를 담아낸다. 이병헌 촬영분을 보니 컷마다 감정이 전부 달라 놀랐다는 이주영 감독의 말은 결코 허튼 소리가 아니다. ‘번지점프를 하다’(2001) ‘달콤한 인생’(2005) 등 작품을 사랑한 관객이라면 아마 뭉클할지도.


결혼한 뒤 꿈을 잊고 사는 아내를 연기한 공효진은 잔잔하게 흘러가다 끝내 강렬한 한 방을 폭발시킨다. 자신의 역할을 딱 맞게 차려입고 자연스럽게 소화해내는 그의 내공이 돋보인다. 나아갈 곳이 막혀버린 젊은이를 대변하는 진아 역의 안소희는 다행히 거슬림 없는 연기를 펼친다. 캐릭터 이해를 위해 꽤나 노력했다는 그는 지금까지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성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감각적으로 채워진 화면들은 관객의 감성을 한층 풍성해지도록 도와준다. ‘반전을 위한 반전’을 의도하지 않은 탄탄한 시나리오와 연출력이 빛난다. 절묘하게 영화의 시작을 열고 끝을 닫는 건 고은 시인의 시 ‘순간의 꽃’의 한 구절.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매일매일 쉬지 않고 노력하는 게 힘들고 귀찮”은 이라면 이 이야기에서 적잖은 울림을 찾을 것이다. 앞만 보고 열심히 뛰다보니 주변을 둘러볼 여유조차 없는, 그래서 많은 것을 놓쳐버리고 뒤늦게 아파할, 그 누군가를 위한 영화다. 이주영 감독의 데뷔작. 95분. 15세가.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