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1월 21일.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왕 고종이 승하했다. 일본인에 의한 독살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경술국치로부터 9년 뒤의 일이었다. 이 해 2월 대한청년단이 김규식을 프랑스로, 여운형을 러시아로, 장덕수를 일본으로 보내 독립운동을 독려했다. 또 최팔용 등 일본 유학생 600여명은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2.8독립선언이다. 그해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은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들불처럼 일었다.
4월 들어 유관순이 독립만세를 주도하다 체포됐고, 중순엔 제암리교회 학살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3.1운동을 계기로 민족교회 중심의 저항의 역사가 본격화 됐다.
총독부 관리 딸, 조선 고아 돌보다
그 해 봄 목포는 일본제국주의의 수탈 전진기지가 됐다. 호남평야의 쌀을 일본으로 실어나르기 위해 신식 항구가 들어섰고, 근대 도시가 형성됐다. 인구 5만. 모던 걸, 모던 보이가 넘쳤다. 목포 출신 소설가 박화성은 작품 ‘추석전야’에 “남편으로 즐비한 일인의 긔와집이요…동북으로 수림중에 서양인 집과 남녀학교와 예배당이 솟아 있는…”이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모던’했다. 그러나 북편, 즉 조선사람 사는 곳은 “도야지막 같은 초막들이 산을 덮어 완전한 빈민굴”이라고 묘사했다.
그 격동의 1919년. 일본 시고쿠 고치현 출신 여덟 살 소녀가 부산을 통해 목포항에 도착했다. 조선총독부 목포부청 관리인 아버지 근무지에서 살기 위해 어머니와 조선에 온 것이다. 다우치 치즈코, 한국명 윤학자(1912~68)였다. 고치교회 2대째 신앙가였다.
같은 해 전남 함평군 옥동마을. 11살 소년 윤치호(1909~1951?)는 몰락한 양반 자제로 곤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윤씨 문중 땅은 다카다라는 일본 지주 손에 넘어가 그의 부모는 소작조차 떼이고 말았다. 소년은 읍내에서 장돌뱅이를 하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잡혀가는 사람들을 목격했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가 다니던 옥동교회 교인들은 구국기도를 이어갔다. 옥동교회는 미국 선교사 줄리아 마틴(마 부인) 여사가 세웠다.
그렇게 소녀와 소년은 ‘식민지의 땅’에서 자랐다. 그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는 것이었다.
1938년 10월 15일 목포 공회당(현 목포상공회의소)에서 결혼 예배가 열렸다. 목포 일본인교회 후루가와 목사의 주례로 윤치호와 치즈코가 하나님 앞에 서약을 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목포 뿐 아니라 경성에서도 화제가 됐다. ‘거지대장’으로 불리던 전도사와 총독부 관리 딸의 결혼이었기 때문이다. 치즈코의 일본인 친구들은 “미쳤다”고 했다.
윤치호는 당시 고아를 한데 모은 ‘공생원’에서 사역 중이었다. 치즈코는 목포고등여학교를 나와 미션스쿨 정명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전직 음악교사였다.
두 사람은 이태 전 치즈코가 공생원에 봉사 나오면서 알게 됐다. 시설 운영자인 윤치호 전도사는 버려진 조선 어린이들을 씻기고 먹이는 치즈코에 반했지만, 신분이 달라 사랑을 고백할 수 없었다. 치즈코는 그때 아버지가 죽고 조산원인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데 치즈코가 시름시름 아팠다. 의사는 부인질환으로 평생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말했다.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던 모녀는 하나님께 의지해 매달렸다. 그 무렵 정명여학교 선배 교사가 치즈코에게 공생원 봉사를 권했다.
한편 윤치호의 신앙과 총명함을 높이 산 마 부인은 그를 양자로 삼고 서울 피어선고등성경학원(현 평택대 전신)에 진학시켰다. 윤치호는 종로 YMCA에서 한용운의 강연을 들으며 민족의식이 고취됐다. 선교사들과 유대가 깊은 윤치호는 일제경찰의 감시대상이었다.
윤치호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가 돼 고향과 목포에서 노방전도로 복음을 전했다. 소방차 앞에서 “지옥불을 꺼야 하는 것을 왜 모르느냐”고 소리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이에 관헌들이 “천조대신이 있는 데 조센진이 왜 외국 신을 믿느냐”고 핍박했다.
그 무렵 목포에는 유진 벨 선교사의 사역에 힘입어 양동교회 등 5개 교회,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 등 미션스쿨에서 크리스천 리더를 길러냈다.
어느 해 마 부인이 본국으로 떠났다. 선교 자금이 부족했던 윤치호는 목포부 호남동에 나사렛목공소를 차렸다. 노방전도는 계속됐고 일경은 그를 못마땅하게 여겨 툭 하면 유치장에 가뒀다. 특히 선교사와 연관성을 엮어 독립운동 배후를 대라며 고문을 가하기도 했다.
1920년대 후반. 그가 북촌 초가집으로 가기 위해 불정대라는 다리를 건너다 거지 소년들을 발견한다. 윤치호는 추위에 떨고 있는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달았다. 그날도 노방전도 등의 이유로 유치장 신세를 지고 나온 때였다.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헐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마 25:35~40)
그는 5~10세 아이들 7명을 데리고 집으로 갔다. “그래 같이 살자”. 공생원(共生園)의 시작이었다.
1930년 발행 목포부사(府史)는 공생원 시작을 1927년 11월 1일 상반정이란 곳에서 집을 빌려 시작됐다고 말한다. 윤치호는 7명의 아이들을 어떻게든 걷어 먹였다. 거지대장은 자연스런 호칭이 됐다.
한국 교회 자생적 아동복지는 그렇게 국경 민족 신분 이념을 넘어 오직 사랑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1945년 해방 후 부부는 현대사의 격동 속에 휘말렸다. 신앙이 아니고선 이겨낼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해방 후 치즈코는 쫓겨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고, 윤치호는 친일로 몰렸다. 하지만 원생과 시민은 “아니오, 그는 아니오”라고 말했다. 이에 용기를 얻어 치즈코는 목포로 돌아왔다. 그러나 6.25전쟁이 터졌다. 인민군은 부부를 미국선교사 앞잡이로 몰았다. “아니오, 그는 아니오.” 부부는 울었다. 이번엔 국방군이 공산부역자로 몰았다. “아니오, 그는 아니오.” 역시 원생과 시민이 살렸다. 부부는 하나님 손길에 울고 또 울었다.
1951년 전쟁통. 윤치호는 고아원에 먹을 게 끊기자, 광주 전남도청을 찾아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목포역에서 기차를 탔다. 치즈코가 배웅했다. 그것이 부부의 마지막이었다. 윤치호는 도청 업무를 마치고 여관에 묵었고 건장한 청년들에 의해 끌려갔다는 게 최후 목격담이다. 빨치산에 희생됐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치즈코는 절망할 수 없었다. 당장 300여명의 아이들 생계가 급했다. 그는 조선의 어머니가 새벽기도로 시작해 닥치는대로 일했다. 늘 검정치마에 흰저고리였다.
근대 복지사역자 윤치호 재조명 필요
지난주일 아침 9시 30분 목포 죽교동 바닷가 공생원. 어린이와 중·고생 30여명이 주일 예배를 보고 있었다. 앞가림을 못하는 아이들은 교사들이 안고 예배를 봤다. 청소년기를 공생원에서 보낸 조영찬 목사(목포함께교회)가 ‘생사화복’이란 제목의 설교를 전했다. “환경을 쳐다보면 자꾸 불신앙에 빠지니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붙들라”고 권면했다.
예배 후 아이들은 숙사로 가거나 원내 놀이터 등에서 놀았다. 윤치호 윤학자 흉상이 서 있는 ‘사랑의 가족 기념비’에 올라가 카메라를 향해 재롱을 피기도 했다. 이렇게 90여년 간 4000여명이 아이들이 예수의 사랑 안에서 양육됐다. 현재는 60여명이 생활한다.
부부는 불행한 한·일 관계를 예수의 사랑으로 넘은 이들이다. 윤학자는 60~70년대 한국정부와 일본정부로부터 상을 받았다. 일본 국민이 마더 데레사만큼이나 존경하는 인물이다. 윤학자의 장례식은 목포시민장으로 치러졌다. 3만여명이 운집했다. 이제 근대 복지사역자 ‘윤치호 전도사’에 대해서도 한국 교회가 고민하고 기릴 때가 됐다.
목포=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