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들에게 부담을 안 주려 사탕 하나도 안 사먹고 모았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지난 16일 정오쯤 아들과 며느리는 직장에 나가고 칼바람이 불며 추운날씨에 집안에 머물던 이모(83)할머니는 초등학교 6학년 손자와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 준비하다 자신의 핸드폰 벨소리에 전화를 받았다.
전화의 상대방은 자신을 경찰서 형사과장이라며 “지금 통장이 도용돼 돈이 인출될 위험이 있으니 당장 은행에 예금한 돈을 찾아 전화기 밑에 숨겨놓아라”는 청천벽력같은 말을 했다.
겁이 난 할머니는 심장병과 당뇨가 심해 거동에 불편한 몸으로 곧바로 은행으로 가 현금 1700만원을 인출해 시키는 대로 집안의 전화기 밑에 현금을 숨겨놓았다.
한숨을 돌리던 할머니에게 또 전화가 왔다.
이번엔 “자신이 형사과장이니 안심하고 거주하는 아파트의 동호수와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려주라”면서 “통장을 다시 만들려면 주민등록등본이 필요하니 동사무소에 가서 떼어오라”고 요구했다.
할머니는 순순히 아파트 동호수와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려줬고, 몸이 불편하니 통장은 다음에 만들겠다고 했다.
이에 “오늘 당장 만들어야 한다. 집에 누가 같이 있냐?”며 “‘손자와 함께 있다’고 하자, 함께 동사무소로가 등본을 찾아오라”고 다그쳤다.
할머니는 떨리는 마음으로 손자와 함께 동사무소를 가기위해 다급히 택시를 잡았고, 경찰을 사칭하는 남자는 할머니가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같은 아파트에 살며 점심을 먹기 위해 들어오다 할머니와 손자를 태운 김모(70) 택시기사는 차에 탄 할머니의 유독 다급하고 안절부절 못하며 통화하는 모습에 이상함을 느끼고 상황을 물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보이스 피싱’을 직감한 김씨는 곧바로 근처에 있던 ‘의왕지구대’로 향했다.
마침 지구대에는 평소 보이스피싱 사건을 자주 접한 김기용(50) 경위와 김노현(43) 경사가 있었다.
“보이스 피싱은 시간과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이들 베테랑 경찰관은 즉시 할머니를 모시고 주거지로 향했다.
김 경사는 “정말 1분이 채 안 걸린 것 같다. 집에 도착해 전화기 밑에 그대로 있는 돈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길게 쉬며 ‘내가 어떻게 모은 돈인데…’라며 눈물을 훔치는 할머니를 보며 경찰관으로서 자부심을 느꼈다”며 “범인까지 잡았으면 최상이었지만 우리가 오는 동안 계속 사이렌을 울리고 왔을뿐 아니라 3~4분 사이에 상황을 종료시켜 시간 싸움에서 이긴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심장병과 당뇨가 심해 얼마 남지 않은 인생에 장례비용을 자식들에게 부담주기 싫어 직접 5년 넘게 아끼고 모아 저축한 돈이었다”며 두 경찰관과 택시기사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의왕경찰서는 이날 기지를 발휘한 택시기사 김씨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며 감사장을 전달했다.
김씨는 “나는 의왕시민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한평생을 살아왔다”며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인데 감사장까지 주느냐“고 말했다.
오문교 서장은 “보이스피싱 등 날로 지능화되는 범죄에 특히 어르신들의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며 “이번 사건은 지역사회 구성원의 적극적인 협조와 노력으로 보이스 피싱 범죄를 예방할 수 있어 더욱 그 뜻이 깊다”고 밝혔다.
의왕=강희청 기자 kangh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