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46)이 말레이시아에서 독살되면서 ‘독을 이용한 은밀한 살인’의 잔혹한 역사가 다시 부각되고 있다. 이번 사건도 첩보영화에나 나올 만한 일이었지만, 실제로 독살은 정적을 제거하는 ‘효과적이며 조용한’ 암살 수단으로 고대에서 봉건왕조 시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숱하게 등장한다.
AFP통신은 15일 가장 대표적인 독살 사례로 불가리아 반체제 작가 게오르기 마르코프가 ‘독 우산’에 암살된 사건을 꼽았다. 영국 런던에 망명 중이던 마르코프는 1978년 인체에 치명적 독극물인 리신(Ricin)이 묻은 우산에 찔려 사망했다. 누군가 뒤에서 실수를 가장해 우산으로 찔렀고, 이후 미안하다고 하면서 사라졌다. 하지만 나흘 뒤 마르코프는 숨졌다. 부검 결과 그의 몸에선 우산을 찌를 때 삽입된 것으로 보이는 지름 1.7㎜ 크기의 캡슐이 발견됐고 그 안에서 리신 성분이 검출됐다. 캡슐은 체온에 녹아내리도록 당 성분이 정교하게 코팅돼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마르코프 독살은 2005년 기밀 해제된 불가리아 공산당 문건을 통해 불가리아 비밀경찰(DS)의 소행으로 드러났고, 암살범은 골동품 판매상으로 위장한 DS요원(암호명 ‘피카디리’)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마르코프가 사망하기 전 동료들에게 “뭔가에 찔려 고개를 돌렸을 때, 우산을 집는 남자를 봤다”고 언급했기에 이 독살사건은 ‘우산 암살’로 알려졌고, 2006년에 동명의 다큐멘터리로 제작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리신 캡슐(‘리친 펠릿(총알)’로도 불림)은 구소련 비밀경찰인 국가보안위원회(KGB)가 개발한 암살 병기로 알려졌으나, 우산이 마르코프에게 리친을 발사하는 무기였는지는 여전히 확실치 않다. 마르코프 암살 열흘 전 비슷한 독살 시도를 모면한 불가리아 출신 망명자는 우산이 아니라 암살자가 들고 있던 소형 가방 안에 리친 펠릿을 발사하는 총이 들어 있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영화에나 나올 법한 수법으로 망명한 반체제인사를 살해했고, 지금까지도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냉전 시대를 대표하는 암살 사건으로 여전히 악명 높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도 위협 인물 제거에 종종 독을 이용했다. 97년 모사드 요원들이 요르단에서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최고지도자 칼리드 알마슈알을 독살하려다 실패한 사건은 널리 알려진 사례다. 알마슈알에게 독극물을 주입하는 데 성공했던 요원들이 붙잡히면서 이스라엘은 그들의 석방과 해독제를 교환했고, 혼수상태에 빠졌던 알마슈알은 극적으로 살아났다.
2004년 우크라이나에선 진보 성향의 야당 대선후보 빅토르 유셴코가 친러시아계 보수 여당 후보 빅토르 야누코비치에 맞서 출사표를 냈다 맹독성 화학물질 다이옥신 테러를 당해 심한 얼굴 변형을 겪었다. 유셴코의 지지자들은 러시아가 배후라고 주장했고, 이 사건의 역풍으로 중도 성향 유권자들의 표심이 유셴코에 쏠리면서 친러시아 정권은 대선에서 패배했다.
같은 해에는 야세르 아라파트 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심한 감기로 프랑스 파리의 군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던 중 갑자기 병세가 악화돼 사망했다. 당시 이스라엘에 의한 독살 의혹이 제기됐지만, 프랑스 정부는 사생활 보호를 이유로 부검을 실시하지 않았고 사인도 심장마비라고 발표했다.
이후 프랑스 검찰은 2012년부터 아라파트 사망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를 진행, 아라파트의 소지품에서 치명적인 희귀 방사성 물질인 폴로늄-210과 납-210을 발견했지만, 자연환경에도 존재하는 극소량이었다며 수사를 종결했다. 별도 조사를 한 스위스 로잔대학 방사선연구소는 “폴로늄이 비정상적인 수준”이라고 반박했지만, 결론이 뒤바뀌지는 않았다. 당시 프랑수아 보슈 로잔대학 방사선연구소 소장은 아라파트 사망 전까지 그가 군병원에서 사용하던 칫솔과 의복, 두건을 아라파트의 아내 수하 여사로부터 넘겨받아 분석한 바 있다. 중동 위성방송 알자지라도 “아라파트의 유품에서 독극물이 검출됐다”고 보도하며 “아내 수하 여사가 부검을 요청했다”고 전했다.
2004년엔 또 인도네시아 인권 운동가 무니르 사이드 탈립이 자카르타에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향하는 여객기에서 독성물질 비소가 든 음식을 먹고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
2006년에는 영국으로 망명한 전직 러시아연방보안국(FSB·KGB 후신) 정보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가 독살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정부를 원색·노골적으로 비판하던 그는 FSB 전 동료들을 만나 차를 마시고 돌아온 뒤 쓰러져 약 3주 만에 숨졌다. 그의 시신에선 아라파트의 소지품에서도 발견됐던 폴로늄-210이 대량 검출됐다.
2011년 11월에 발생한 구카이라이(谷開來) 독살 사건은 치정과 배신을 배경으로 중국 당 지도부의 역학관계와 맞물려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당시까지 유력한 ‘차세대 지도자’였던 전 충칭시 당서기 보시라이(薄熙來)의 아내 구카이라이는 한때 연인이자 부동산 사업 동업자였던 영국인 닐 헤이우드가 사업상의 이유로 배신한 뒤 협박의 조짐이 보이자, 그를 충칭의 난산리징두자(南山麗景渡假)호텔로 유인해 청산가리(시안화칼륨)를 뿌린 탕을 먹여 살해했다. 베이징대 법대를 졸업한 변호사로 국제 정치학 석사 학위를 가진 ‘붉은 귀족’ 구카이라이의 범행은 치밀한데다 무서우리만치 침착해 이후에도 큰 파문을 남겼다.
구성찬 기자 ichthu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