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년 동안 두 사람은 1인 4역을 해왔다. 평일엔 신대원생, 주말엔 경북 구미제일교회(김경택 목사)의 교육전도사, 방학 땐 인도 구자라트주 빈민촌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로 쉴 새 없이 달려왔다.
2002년 월드컵이 열리던 해, 건설회사에 다니던 문 선교사는 대구월드컵경기장 건축을 마지막으로 사직서를 냈다. 입사 10년차, 남들이 한참 일할 때라고 말하는 서른넷의 나이에 내린 결정이었다. 사직서를 냈다는 남편의 말에 김 선교사는 “‘기도로 준비한 순간이 비로소 찾아왔구나’ 싶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고 회상했다.
시기는 다르지만 두 사람은 기적을 체험하며 ‘선교를 위해 삶을 헌신할 것’을 서원했다. 김 선교사는 1997년 갑작스런 뇌출혈로 생사를 오갔던 어머니가 김 선교사의 1개월에 걸친 밤샘기도 후 회복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헌신을 약속했다. 문 선교사는 1999년 직접 기적을 체험했다. 직장생활 중 받은 건강검진에서 희귀병인 우육종증(비괴사성 염증 질환) 판정을 받은 뒤 100일 동안 새벽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을 만났다. 원인을 알 수 없었던 우육종증은 6개월 만에 사라졌다.
2002년 캐나다를 시작으로 5년여 동안 호주 뉴질랜드 동티모르 이집트 등 6개국에서 선교활동을 펼친 두 사람은 2007년 다시 한 번 기로에 섰다. 김 선교사는 “당시 호주의 한 선교단체에서 선교사 훈련을 위한 통역학교 개교를 준비 중이었는데 교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했다”며 “마음만 먹으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 선교사는 “아내와 함께 처음 선교지로 나설 때 복음의 불모지를 찾아 나서겠다고 서원했던 것을 떠올려보니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며 “기도 끝에 강경파 힌두교가 장악한 인도 구자라트주로 향했다”고 덧붙였다.
영어에 능통했던 두 사람은 정부에서 운영하는 초등학교에서 영어 강의를 하며 학생들에게 찬양을 가르쳤다. 화요일과 토요일엔 수라트 시내에 있는 빈민촌을 찾아가 아이들에게 간식을 주고 성경교실을 열었다. 신분 차별이 남아있는 인도사회에서 ‘평등’과 ‘사랑’으로 대하는 두 선교사의 모습은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젖혔다. 2008년부턴 시 외곽의 원주민 마을에 교회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원주민 마을에 가보니 신앙을 가진 몇 가정이 모여 흙집을 짓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어요. 때마침 저희를 파송했던 교회의 소속 노회에서 후원 연락이 와서 벽돌로 건축된 첫 교회를 지을 수 있었지요. 지금은 교회 12개와 12명의 리더가 세워졌습니다.”(김 선교사)
두 사람은 다음 달 강도사 과제 제출을 마무리 한 뒤 출국할 예정이다.
“적잖은 나이였지만 인도에 세워질 크리스천 리더들을 신학적으로 더 바르게 양육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도전한 것이 열매를 맺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또 다른 선교의 막을 힘차게 열어 나가겠습니다.”
최기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