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이민 3세 시민권 취득 완화... 알프스 넘지 못한 반 이민 광풍

입력 2017-02-13 17:13 수정 2017-02-13 17:30
스위스 유권자들이 12일(현지시간) 오버작센의 야외 투표소에서 귀화 규제를 완화하는 법안의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에 참가하고 있다. AP뉴시스

스위스가 자국 내 귀화 규제를 완화하는 법안을 국민투표로 통과시켰다. 기존의 이민자도 내쫓는 미국과는 정반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세계에 휘몰아 친 반이민주의가 유럽의 한복판에서 거부당했다는 반응이 나온다.

 AFP통신은 12일(현지시간) 이민 3세대의 귀화 요건을 완화하는 조치를 담은 법안이 60.4%의 지지율로 가결됐다고 전하며 스위스 이주자의 손자녀가 귀화를 신청할 경우 행정 절차를 단축해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이 법안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법안에 찬성한 스위스 민심은 총 득표수와 26개주 과반득표이라는 두 가지 통과 요건도 모두 충족시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반 이민 행정명령 후폭풍과 스위스 극우세력의 여론전을 뛰어넘은 법안 통과로 3세대 이민 가정 출신 외국인 약 2만5000명이 스위스 귀화를 신청할 수 있게 됐다.
스위스 국민투표 관계자들이 12일(현지시간) 오버작센의 개표소에서 투표 결과를 집계하고 있다. AP뉴시스

 한때 국민투표를 앞두고 극우 스위스국민당(SVP)을 중심으로 반 이민·이슬람 여론몰이가 거세지면서 최근 여론조사에선 법안 반대 비율이 10%정도 상승해 부결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스위스 극우 진영에서는 검은색 니캅(눈만 드러낸 베일)을 쓴 여성 그림과 ‘통제 불능의 귀화? 아니다’란 문구가 들어간 자극적인 포스터를 거리에 도배하며 부결 캠페인을 펼쳤다. 장 뤽 아도르 시민권촉진반대위원회 공동의장(SVP 의원)은 “한 세대, 두 세대 안에 이민 3세가 되는 외국인들이 누구겠냐”면서 “아랍의 봄 당시 태어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아프리카 북동부(수단·에티오피아),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출신들”이라고 주장하며 이슬람 혐오와 공포 조장 논란에 불을 지폈다.
지난 7일(현지시간) 스위스 취리히 거리에 검은색 니캅(눈만 드러낸 베일)을 쓴 여성 그림과 ‘통제 불능의 귀화? 아니다(Unkontrolliert einburgern? NEIN)’란 자극적 문구가 들어간 극우 진영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포스터 위로 ‘주의’와 ‘가짜뉴스’란 말을 적은 메모지가 동시에 붙어 있어 눈길을 끈다. 가디언 홈페이지

극우 성향 스위스국민당(SVP) 행사에 등장한 반 이민 캠페인 광고물. AP뉴시스

 소피 기냐르 베른대학교 정치학 연구소 선임연구원은 12일 영국 일간 가디언에 “이번 법안이 처음부터 특정 종교와 전혀 연관성이 없었다”고 일축하며 SVP가 무슬림의 스위스 시민권 취득과 스위스 고유가치의 상실을 하나로 엮어 위기감을 조성했다고 비난했다. 이슬람교를 악마화한다는 비판을 받아 온 SVP는 지난 2009년에도 모스크 미나레트(이슬람 사원의 기도탑) 신축 금지 방안을 추진한 바 있다.

 ‘하늘의 별 따기’로 알려진 스위스 시민권 취득은 길고 복잡한 과정으로 이민자들에게 악명 높다. 스위스에서 태어났어도 12년을 거주하고서야 비로소 시민권 신청 자격이 생기고 정부가 주관하는 시험과 면접도 통과해야 해 준비과정이 복잡하고 비용도 많이 든다. 기존의 가장 ‘빠른’ 시민권 취득 경로는 스위스 국민과 결혼해 6년 이상 거주하는 것이었다. 높은 귀화의 문턱으로 스위스 전체인구의 약 4분의 1이 국적상 외국인으로 등록되어 있는데 이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상당히 높은 비율이다.

 스위스 이민국 조사에 따르면 3세대 이민자로 분류되는 인구 중 거의 60%가 이탈리아계이고 발칸국가들과 터키 출신이 그 뒤를 잇고 있어 극우 진영이 주장하는 아랍권 이민자 난입으로 인한 혼란의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구성찬 기자 ichthu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