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마음속 경찰 사라진 시대 ” 양심의 가책 못 느껴

입력 2017-02-10 16:45
#1. 지난달 31일 서울 강남구에 있는 ‘국정농단 의혹 규명 특검’ 사무실 앞. 취재진 앞에 선 유재경 미얀마 대사가 입을 열었다. “지금도 누가 저를 (미얀마 대사로) 추천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로부터 약 3시간 뒤 이규철 특검 대변인은 유 대사의 발언을 뒤집었다. “유 대사 본인이 최순실의 추천으로 대사가 됐다는 점은 현재 인정하는 상황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특검 조사실에 불려간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거짓말이 들통 난 것이다.

#2. 금 가공업체 직원이었던 A씨. 그는 금 추출사업에 투자하면 매월 투자금의 5%를 수익금으로 주겠다며 같은 교회에 다니는 성도 3명으로부터 6년 동안 6억원 넘게 받아 챙겼다. 결국 사기죄로 기소돼 지난해 말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지난달 9일 열린 ‘최순실 등 민간인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7차 청문회 광경. 수십명에 달하는 증인들이 출석했지만 진상규명은커녕 “나는 모른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발뺌하면서 청문회를 ‘무용지물’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이 쇄도했다.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작금의 세태를 반영하듯 위증·무고·사기 등 3대 거짓말 범죄는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출처=국민DB

거짓말 홍수 시대다. 최근 몇 달 간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최순실 국정농단’ 관련 뉴스에는 ‘위증’ ‘무고’ ‘사기’ 같은 거짓말 범죄 용어들이 도배되고 있다. “위증죄로 처벌받는 것보다 청와대가 더 무서워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는 한 경제단체 고위 임원의 고백은 ‘권력 앞에서 거짓말쯤 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인식이 팽배한 작금의 세태를 반영하는 듯하다.

거짓말 범죄 매년 증가세
“법무장관 시절에 조사해보니, 3대 거짓말 범죄(위증·무고·사기)가 검찰 업무의 70%를 차지하고 있더라. 거짓말 때문에 다른 업무를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봐라. 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처사인가.” 법무부장관과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김승규 장로는 개탄을 금치 못했다.

법조계 경력만 35년인 김 장로는 10일 “당시(2003년) 일본과 우리나라의 거짓말 범죄 건수를 비교해봤더니 우리나라가 위증은 16배, 무고는 9배, 사기는 26배나 더 많았다”면서 “일본 인구가 한국보다 3배 가까이 되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인들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일반인이나 크리스천이나 마찬가지”라고 안타까워했다.

대법원에 따르면 1심 법원에 접수된 위증죄 사건은 2012년 1181건에서 지난해 1365건으로 15.6% 늘었다. 같은 기간 무고죄는 1351건에서 1512건으로 11.9%나 증가했다. 서울북부지검에 따르면 지난해 관할 지역의 위증 관련 사범 적발 건수는 81명으로 2015년(24명)보다 무려 3배 이상으로 늘었고, 같은 기간 창원에서는 위증 및 무고 사범의 적발 비율이 21.8%나 증가했다.

“마음 속 경찰 사라진 시대”
거짓말 범죄가 갈수록 늘어나는 이유는 뭘까. 치열한 경쟁과 성과·물신주의 때문일 수도 있고, 정과 의리가 앞서는 한국사회의 독특한 정서 탓일 수도 있다는 게 학자들의 분석이다. 그러나 크리스천의 시각은 조금 다르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을 창립한 손봉호(고신대 석좌) 교수의 진단이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가 무신론으로 향하고 있는 상황과 무관치 않다. 세상이 점점 세속화하면서 저마다 ‘마음속의 경찰’이 사라져 버렸다. 또한 정직과 신용, 믿음, 신뢰 같은 고귀한 가치보다는 돈과 권력, 명예를 좇는 세속적인 가치를 더 따르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도 거짓말을 부추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목회자윤리위원회 서기 정주채 목사는 “크리스천들의 경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 아니겠느냐”면서 “하나님을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만유(萬有)의 주’라고 저마다 고백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실천하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
거짓말에 대한 위험과 경고는 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거짓말의 말로(末路)가 얼마나 끔찍한지도 보여준다. ‘나봇의 포도원’(왕상 21장) 사건이 대표적이다.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은 나봇이 주인인 포도원을 뺏기 위해 건달 2명을 내세워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위증하게 한 뒤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강탈했다.

이 일을 지켜본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아합 왕의 비참한 죽음을 예언했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네 몸의 피도 핥을 것이다.” 예언은 3년 뒤에 아합 왕에게 그대로 이뤄졌다. 이밖에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고(잠 12:22), 벌을 면치 못할 것(잠 19:5)이라고 성경은 경고한다.

보디발의 아내(가운데)가 스스로 옷을 찢어놓고선 가정 총무를 맡고 있던 요셉(왼쪽)이 자신을 겁탈하려 했다고 거짓말(무고)을 하고 있다. 보디발은 분노에 찬 얼굴로 왼손은 허리춤에, 오른손은 아내의 어깨에 올려놓고 항변을 듣고 있다. 누명을 쓰고 있으면서도 두 손을 모으고 상황을 지켜보는 요셉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창세기 39장에 등장하는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에 관한 렘브란트의 작품(1655)이다. 출처=미국내셔널갤러리

손 교수는 “거짓말을 하면 당장은 이득을 볼지 모르지만 훗날에는 반드시 손해를 보게 돼 있다. 거짓말은 결국 자해행위”라며 “진실과 정직이 크리스천의 귀한 책무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십계명 중 제9계명) 이에 대한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은 450년 전에 채택된 신앙고백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대를 겨냥한 메시지로 다가온다.

“문: 제9계명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답: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거짓 증언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말을 왜곡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을 험담하거나 비방하지 않고 말을 들어보지도 않은 채 성급하게 남을 정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법정이든 어디에서든 거짓말과 온갖 위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마귀가 사용하는 도구로써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를 불러옵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정직하게 진리를 말하며 공개적으로 진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내 이웃의 명예를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박재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