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목사는 “장날마다 어르신들이 머리에 짐을 이고 오가는 모습이 안타까워 운전대를 잡은 게 지금은 5일마다 돌아오는 일상이 됐다”면서 “오늘(7일)은 1년에 한 번 어르신들과 온천여행 가는 날이라 관광버스 기사가 되는 날”이라며 웃었습니다.
1999년 감리교신학대 신학대학원 졸업 당시 그는 ‘전국의 산골, 농촌을 돌아다니다 빈집이 있으면 들어가 살면서 농촌목회를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강원도에서 시작해 전국을 순회할 요량이었는데 음성에서 목회를 펼치던 한 목회자의 권유로 이곳을 찾은 것이 새로운 삶의 둥지가 됐습니다.
그러나 음성 농민교회 성도들의 반응은 한겨울 한파보다 더 싸늘했습니다. 예배 때나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성도들은 당시 김 전도사를 “어이 재철씨”라고 불렀고, 회의에서 제안이라도 하나 하면 원수를 대하듯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곤 했습니다.
“‘언제 갈껴. 목사 따믄 갈껴’라고 따져 묻는 일이 절 만나는 성도들의 인사말이었습니다. 이런 게 목회라면 그만두는 게 낫다는 생각만 들었지요. 어느 날 성도들 마음에 쌓인 아픔과 상처가 보였습니다. 제가 담임 목회자로 오기 전 이미 세 분의 목회자가 짧게는 3개월 만에 교회를 떠났더군요. 그래서 제게 정을 주지 않고 타인으로 대한 겁니다.”
소여리 마을의 진정한 식구가 되기로 마음을 먹자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눈으로 주민들을 보게 됐습니다. 장례에 손이 부족할 땐 가족들 대신 상여를 메고 장지를 향했습니다. 쇠약해지던 어르신들을 도우러 논밭으로 나서던 건 이제 ‘공동농사’로 자리 잡아 농도생협에 된장 간장 등을 판매하는 공동의 살림살이가 됐습니다.
“‘언제 떠날거냐’는 가시 돋힌 인사말에 ‘안갈 뀨. 여기 살려고 왔슈’라며 대답한 게 제 호칭이 ‘우리 목사님’으로 바뀐 결정적 한방이었습니다. 성도들의 말 못할 아픔을 보듬어줄 수 있는 생명살림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게 소망입니다.”
최기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