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들 안동 하회탈 알지? 씨익 웃고 있는 거. 그거 왜 그렇게 웃고 있는지 알아?”
영화 ‘더 킹’의 첫 장면.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조인성 정우성 배성우가 히죽거리며 농담을 한다. 관객은 난 데 없는 ‘하회탈 드립’에 의아할 법하다.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깨닫게 된다. 이는 ‘지금부터 시원한 마당놀이 한 판을 펼쳐 보이겠다’는 선언과 같다는 것을.
‘더 킹’은 왕이 되고자 했던 주인공 태수(조인성)의 삶을 통해 권력의 허망함을 조롱한다. 권력을 쥐고 폼 나게 살고 싶어 검사가 된 태수는 ‘실세’ 정치검사 강식(정우성)을 만나 인생의 정점을 맛보기도,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태수의 내레이션을 삽입하고 다큐멘터리 형식을 적극 차용함으로써 현실감을 불어넣었다는 점이 이 영화의 특징이다. 1980~2010년대 현대사를 관통하면서 역대 대통령들과 실제 사건들을 직접 거론한다. 특히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당시 뉴스 화면이 그대로 나온다. 이를 통해 정권 교체시마다 ‘줄’ 잡기에 여념이 없는 정치검찰의 비릿한 민낯을 고스란히 까발렸다.
개봉 전 ‘정부 외압설’이 돌 정도로 민감한 소재였고, 그만큼 용기 있는 도전이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전 촬영이 끝난 작품임에도 신기하리만큼 현실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한재림 감독은 “실제 외압은 없었지만 상업적으로는 부담스러운 지점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더 킹’은 풍자와 해학이 미덕인 마당극의 성격을 띤다. 상황 자체가 극적이거나 배우들이 연극 톤으로 대사를 치는 식이다. 특히 권력의 화신인 강식과 그의 수하들이 자자의 ‘버스 안에서’, 클론의 ‘난’ 등 댄스곡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에선 여지없이 웃음이 터지고 만다.
“무게 잡고 있던 권력자들이 어떤 모습을 보여주면 관객들이 웃겨 할까 생각했죠. ‘버스 안에서’ 가사가 이 사람의 상황과 너무 어울리지 않잖아요. ‘난’에서도 ‘밥밥띠라랍’이라는 단순한 여흥구와 군무가 이들과 안 어울리고요. 그런 것들이 그들의 점잔 떠는 부분과 상반되면서 재미있는 지점이 될 거라고 생각한 거죠.”
한재림 감독은 “마당극처럼 서민의 애환과 분노를 달래고 확 풀어버릴 수 있는 경쾌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며 “아픔과 슬픔 속에서도 결국 새로운 희망의 길로 나아갔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권력이란 게 되게 매력적이죠. 화려해보이고요. 하지만 실체는 없어요. 꼭대기 층 펜트하우스, 쌓아올린 샴페인 잔…. 전부 한 순간 무너지고 가라앉는 것들이에요. 한낱 깃털 같은 거죠.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될 것이냐’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권력의 화려함을 시각화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번쩍이는 스타 캐스팅이 필요했다. 특히 극 분량의 90% 차지하는 태수 캐릭터가 관건이었다. 고등학생부터 40대 초반의 모습까지 소화할 수 있어야 했고, 마스크 자체가 신선해야 했으며, 투자사나 관객들에게 호감형인 인물을 찾아야 했다. 조인성밖에 없었다.
다행히 조인성이 ‘시나리오가 너무 재미있다’며 출연 제안을 수락했다. 완벽했다. 남자답고 털털하고 유머러스한 면까지 태수와 판박이였다. 그렇다면 강식 역은 조인성의 롤모델이자 워너비가 될 만한 인물이어야 했다. 단 한 사람, 정우성이 떠올랐다. 정우성 역시 ‘내가 망가지겠다’ ‘이런 용기 있는 시도가 너무 좋다’며 흔쾌히 합류했다.
한재림 감독은 “영화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요소가 시나리오와 캐스팅”이라며 “캐스팅에서 이미 작품의 반 이상이 이루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두 배우의 존재가 이 영화에서 굉장히 큰 힘을 발휘했다”고 말했다.
주인공들이 완벽한 수트 차림으로 등장하는 신이 많은 것도 감독의 의도였다. 권력의 화려함을 강조하려한 것이다. “솔직히 조인성 정우성이 했기 때문에 우리가 공감하는 거예요(웃음). 보통 누가 양복을 빼입고 있다고 해서 그게 부러워보이진 않거든요. 여자 분들이 볼 때 ‘에이 뭐야 아저씨들’ 그럴 수도 있고요. 멋있는 사람들이 해야 이해가 되는 거였어요. ‘권력이라는 게 저렇게 화려하고 멋있구나’라고.”
캐릭터들이 워낙 현실적으로 그려진 탓에 김기춘 우병우 등 특정인물을 염두에 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한 감독은 “그렇게 연상할 수 있으나 의도한 건 아니었다”며 “어느 분야에서든 자기만을 위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고 말했다.
“한국사회에는 이기주의나 엘리트주의, 출세주의 같은 부조리가 만연해있는 게 사실이에요. 부모는 자식에게 ‘정의롭게 살아야 된다’고 가르치지만 역사를 보면 권력에 기생하는 삶을 선택한 자들이 훨씬 잘 살죠. 우리가 해결해야 할 것들을 뭔가 해결하지 않은 겁니다. 어떤 명분이나 힘의 논리에 의해 지나쳐온 것들이 지금 (한꺼번에) 터지는 거예요. 그게 비극적인 거죠.”
‘더 킹’은 910만 관객을 동원한 ‘관상’(2013) 이후 4년 만에 내놓은 작품이다. 흥행에 대한 부담보다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이 더 컸다는 게 한재림 감독의 말이다.
그는 “‘관상’은 굉장히 대중적인 작품이었던 데 비해 ‘더 킹’은 조금 다른 차원이었다”며 “한국에서 쉽지 않는 블랙코미디라는 장르에, 다큐멘터리 터치까지 가미한 부분들이 관객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했다”고 얘기했다.
“저 같은 경우 ‘부재에 대한 욕망’이 창작의 원천인 것 같아요. 이미 해봤던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재미가 없으니까. 내가 가지지 못한 것 혹은 안 해본 것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나를 자극하는 것 같아요. ‘관객들이 이런 걸 재미있어 하지 않을까’라는 서프라이즈 같은 것도 있을 수 있겠고요. 그 두 가지를 왔다 갔다 하는 거죠.”
한재림 감독도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있다. 얘기를 전해 듣고 깜짝 놀랐다는 그는 “과욕인 것 같다. 그렇게 해서 되는 게 아니잖나. 너무 시대착오적이다.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런 걸 만드나. 답답할 따름”이라고 탄식했다.
‘더 킹’ 결말에 담긴 의미는 꽤나 묵직하다. ‘권력의 진정한 주인은 국민’이라는 것. “당신의 선택에 따라 이 사회는 비극적일 수도, 희망적일 수도 있다. 촛불로 모인 이들이 이 세상을 조금씩 움직여가고 있는 것처럼. 그런 힘을, 희망을 다시 느꼈으면 좋겠다.” 한재림 감독이 ‘더 킹’을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