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종교개혁 500주년과 루터를 넘는 신학을 위하여

입력 2017-01-28 14:58 수정 2018-01-27 22:35
최충하 목사('교회의 일치와 하나님의 영광'의 저자, 예장 대신 총회 전 총무)


16세기의 종교개혁은 마틴 루터가 연구하고 강의했던 로마서에서 시작되었다.

평소에 그는 "죄인인 내가 어떻게 해야 은혜로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하며 고민하다가 로마서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진리를 발견하여 이신득의(Justification by Faith)의 구원론을 깨닫게 되었고, 당시에 가톨릭교회의 부패의 상징인 면죄부 매매를 반박함에 있어서 속죄를 위해 그리스도의 보혈을 동전 몇 푼으로 매매하는 행위가 옳은 것인지 토론하려고 95개 항의문을 게시했다.
최충하 목사

그리고 그는 신자들이 직접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출판하여 '말씀에 의한 개혁'의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기를 힘썼다.

이러한 루터의 공헌은 지금까지 500년 동안 빛나는 업적으로 칭송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교회의 개혁이 강조될 때마다 교회의 분열이 점점 더 심해져서 이제 기독교 교단들이 수없이 많아져 선교에 큰 장애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개혁과 함께 일치가 강조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논제를 제시함에 있어서 중요한 일은 신약학계의 새로운 로마서 연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40여년 전부터 새로운 연구에 의하면, 루터의 구원론적 관점으로 로마서 전체를 해석하는 데에 무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제 21세기에 로마서의 목적을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저자인 바울의 관점으로 돌아가서 해석하여 루터를 넘는 신학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루터의 이신득의의 신학은 로마서에서 최우선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절대적인 구원의 진리이다. 그러나 믿음에 의한 의인화는 로마서 16장 전체에서 볼 때 1-4장에 집중되고 있을 뿐이며, 더 중요한 것은 다음의 12장이나 되는 긴 장들의 내용이다.

1970년대부터 로마서가 교리적 편지가 아니라 상황적 편지라는 것이 주목받으면서, 1990년대에 신약학계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게 되어 이제는 새로운 관점에 의한 해석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

필자는 로마서가 이신득의의 구원론을 기초하되 교회론적 관점을 가지고 쓰인 것이라고 본다. 바울은 평소에 자신이 복음을 전해서 세워진 교회들을 염려했다(고후 11:28).

그의 편지는 대부분 교회분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볼 때, 그의 염려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로마서 역시 이러한 염려를 가지고 매우 신중하게 쓴 편지이며(롬 1:11; 15:15), 분열된 로마교회의 일치를 위한 바울의 소원기도는 로마서 15:5-6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희생의 봉사적 자세를 가지고 교회가 일치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며, 이것이 로마서를 쓴 목적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루터를 넘는 신학의 의미는 그의 구원론이 기초된 교회론을 로마서에서 확립하자는 것이다. 지금 21세기에 교회의 분열이 가장 극심한 한국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로마서의 새로운 연구를 통해 교회론을 확립하는 것이 너무나 절실하다.

16세기 종교개혁 시작의 핵심은 면죄부 매매에 의한 속죄의 비성경적 적용이었다면, 오늘날 제2의 종교개혁은 분열에 의한 다양성의 비성경적 적용을 개혁하는 것이어야 한다. 교회의 분열은 값없이 주어진 속죄의 은혜를 받은 신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불의이다.

영원한 멸망의 심판에서 속죄 받은 신자가 다른 신자를 비방하면서 자기의인화의 불의를 행할 수는 없는 일이다. 속죄를 위해 그리스도의 보혈을 동전 몇 푼으로 매매하는 것과 같은 배은망덕한 일이 현대에도 계속되고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분열시켜 피 흘리게 만들고도 “하나님의 심판대”(롬 14:10) 앞에 서게 만들 엄중한 분열죄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면서도 한국교회가 분열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다양성의 비성경적 적용 때문이다. 로마서 12:3-8에 의하면 다양성은 일치를 전제한다. 교회의 분열, 교단의 분열, 연합기관의 분열을 반복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 모든 지체들은 교회일치적 행함에 힘써서 "한 몸"(롬 12:4)이 되어야 한다.

성경은 오늘도 영원한 진리이지만, 성경대로 살지 않는 우리의 악습인 편협한 입장고수 때문에 분열이 반복되고 있다. 설령 보수 혹은 진보의 입장이든지 간에 그것이 말씀보다 더 권위를 가진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러운 것이 된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다양한 역할 속의 일치를 거부한다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보혈과 관계가 없는 신자라고 할 수 있다. 이제 구원에 안주하게 만드는 루터의 신학을 넘어서 모든 신학연구의 업적은 교회의 일치에 대한 기여도로 평가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교회일치의 신학이 21세기 한반도의 통일시대에 급성장한 한국교회의 목회와 선교 역량을 빛내는 일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외부필자의 기고 및 칼럼은 국민일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