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가면을 썼습니다. ‘비선 실세’ 최순실씨가 말이죠. 전날 특별검사팀에 강제구인됐을 때 “억울하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최씨가 오늘 재소환됐을 때는 마스크로 입을 가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변호인인 이경재 변호사의 ‘특검팀 강압수사’를 주장하는 기자회견이 예정돼 있어 더 이상 소리를 지를 필요가 없어졌다고 봤을지 모릅니다. 하여튼 흐름이 이상합니다. 어제는 최씨의 강압수사 주장에 이어 박근혜 대통령이 보수성향 인터넷 방송 ‘정규재 TV’와 인터뷰를 갖고 누군가의 기획에 따른 음모론을 제기했고 오늘은 이 변호사가 공식 기자회견까지 열었으니까요. 누군가 ‘우리나라 권력서열 1위는 최순실, 2위는 정윤회, 3위는 박근혜’라고 했는데 1위와 3위가 합작해 조직적인 반격에 나선 듯합니다. 공식 수사 37일째(1월 26일 목요일)의 이야기입니다.
# 입 다문 최순실=최씨는 오전 9시50분쯤 특검팀 사무실에 다시 출두했습니다. 호송차에서 내렸는데 전날과 달리 마스크로 입을 가리고 있었죠. 취재진이 “강압수사했다는 주장의 근거가 뭐냐”고 물었지만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제와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조용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조사실로 올라갔죠.
앞서 최씨는 전날 특검팀에서 조사를 받고 12시간여 만인 밤 12시쯤 일단 서울구치소로 갔습니다. 오전 강제소환 때 취재진을 향해 고함을 쳐 국민을 경악케 했던 그는 구치소로 갈 때에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습니다. 기자들로부터 “오전에 출석하면서 준비된 발언을 했느냐” “묵비권을 행사했느냐” 등의 질문을 받았지만 오늘처럼 입을 굳게 다물었죠. 특검팀에 따르면 최씨는 조사 과정에서 시종 묵비권을 행사했다고 합니다.
# 변호인 기자회견=최씨 변호인인 이경재 변호사는 오전 11시 자신의 법무법인 동북아 사무실이 있는 서울 서초구 정곡빌딩에서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이 변호사는 특검팀이 인권침해와 위법적 수사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특검 사무실 CCTV 녹음·녹화 내용을 공개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변호인 측 주장은 이렇습니다. 우선 지난달 24일 최씨가 특검팀에 처음 소환됐을 때 그날 밤(10시40분∼새벽 1시) 변호인을 따돌리고 신문하며 폭언을 연발해 정신적 피해를 가했다고 하는군요. 특검팀 담당검사가 최씨에게 △죄는 죄대로 받게 할 것이고, 삼족을 멸하고 모든 가족들을 파멸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딸 정유라는 물론이고 손자까지 감옥에 가게 될 것이며 대대손손 이 땅에서 얼굴을 못 들게 하고 죄를 묻고, 죄인으로 살게 할 것이다 △특검에 들어온 이상 협조하는 게 좋을 것이다 등의 고압적 폭언·위협을 통해 가혹행위를 했다는 겁니다. 또 “박근혜 대통령과 모든 면에서 공동체라는 걸 자백하라”고 최씨에게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죠.
취재진이 그 근거를 묻자 변호인 측은 특검팀 사무실 CCTV 내용 공개를 주장한 뒤 특검팀이 이의가 있다면 검찰·경찰·국가인권위원회 등 제3의 기관이 조사하면 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 특검팀, “일방적 주장의 허위사실”=이 같은 주장에 대해 특검팀은 어이가 없다는 모습입니다. 이규철 대변인은 오후 정례브리핑에서 변호인 측 주장을 일축했습니다.
“특검은 수사 과정에서 피의자 또는 참고인들에 대해 어떤 강압수사나 자백 강요 등 인권침해를 한 적이 없다. 최씨의 경우 국정농단 의혹의 핵심 수사 대상자로 더욱 철저히 객관적 자세로 엄중히 수사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담당검사가 최씨 변호인 주장대로 ‘삼족을 멸한다’는 등의 말을 한 적이 전혀 없다. 2016년 12월 24일 소환은 피의사실에 대한 피의자 입장과 개괄적 내용 파악을 위한 것으로 변호인 조력을 침해할 이유가 없었다. 퇴소 시간도 23시56분이다. 특검은 최씨가 허위사실을 바탕으로 특검과 해당 검사들의 신뢰와 명예를 훼손한 데 대해 깊은 유감이다. 변호인 기자회견 등 일방적 주장에는 일체 대응하지 않을 예정이다.”
이 대변인은 취재진과의 일문일답에서 부연설명을 했습니다. 변호인 측 주장과 관련된 사실관계 중에서 최씨가 12월 24일 부장검사 사무실로 이동해 면담을 한 건 맞다, 면담은 22시30분쯤에서 23시35분쯤까지 약 1시간 동안 이뤄졌다, 당시 변호인이 22시40분쯤 떠날 때 정식 조서 작성이 아닌 간단한 면담 과정 있을 것이란 말을 해줬다, 변호인에게 돌아갈 것인지 물어봤는데 간다고 했고 최씨도 면담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었다, 그리고 부장검사실에는 CCTV가 없기 때문에 진실은 두 사람의 말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복도에 있는 CCTV로 조사시간 확인은 가능하다, 면담 당시 문이 열려진 상태였고 문앞에 여자 교도관이 앉아 있었는데 만약 최씨 말이 맞다면 큰소리가 났을 텐데 그런 적이 없었다, 판단은 기자 여러분이 해달라, 이 대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박근혜-최순실 측의 모종의 움직임이 설 연휴를 앞둔 여론전 성격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탄핵심판을 지연시키고 특검팀을 흠집 내기 위한 전략적 반격이라는 관측입니다. 시간을 끌어 상황을 반전시키겠다는 노림수죠. 그렇다면 어처구니없는 ‘쇼’입니다.
박정태 선임기자 jt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