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자금 규모에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나지만 그림을 좋아했고, 꾸준히 모았다는 점에서는 같다. 또 작품 구입에 들일 수 있는 자금 크기가 다르다보니 컬렉터로서 걸어온 길도 사뭇 달랐다. 같으면서 다른, 두 컬렉터로부터 직접 컬렉션 요령에 대해 들어보시라.
“니 지금도 그림 모으고 있나 하고 놀라데요. 그 친구는 지금도 처음 산 그림을 그대로 갖고 있거든요.”
표준말을 썼지만 억양은 속일 수 없다. 대구 사투리가 정감 있는 리안 갤러리 안혜령 대표. 리안갤러리는 2007년 3월 대구에서 문을 연 뒤, 그해 10월 리안갤러리 창원에 이어 2013년 1월 경복궁 옆 서촌에 리안갤러리 서울을 열었다. 리안갤러리는 2007년 개관전으로 앤디 워홀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알렉스 카츠의 첫 국내 개인전(2007), 데미안 허스트(2009), 짐 다인(2011), 데이비드 살리(2013), 키키 스미스(2014), 프랭크 스텔라(2015)의 개인전을 선보이며 단박에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국내 활동뿐만 아니라 베이징 아트페어, 싱가포르 아트페어를 거쳐 2014년부터는 아트바젤 홍콩에 참가한다. 아트바젤 홍콩은 심사가 깐깐해 국내 10여개 화랑만이 참가한다. 따라서 페어 참가 자체가 좋은 화랑의 보증수표나 마찬가지이다. 따지고 보면 수집을 계속하느냐, 중단하느냐의 사소한 차이가 수십 년 후 거대한 차이를 만들었지 싶다. 지난해 9월 초 리안갤러리 서울에서 그녀를 인터뷰했다. 그가 앉은 자리 너머로 오스트리아 작가 프란츠 웨스트의 조각 작품이 보인다. 2009년 20만 달러에 구입한 이 작품은 지금은 80만 달러를 호가한다.
“취미로 모았는데, 이게 돈이 되고, 나이들이 직업까지 만들어주네요. 제가 화랑 차릴지 누가 알았겠어요!”
나긋하면서도 밝은 목소리가 매력적인 안 대표에게서 신혼 주부 컬렉터의 흔적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가 그림 구매를 시작한 것은 26세 때다. 첫 아기를 둔 신혼 주부가 그림 구매에 나섰던 것이다.
미대에 가고 싶었던 안 대표는 부모님의 반대로 수학과에 진학했다. 결혼을 하고서야 그림을 그리겠다고 거실에 이젤을 폈다. 집안 곳곳엔 유화 물감이 덕지덕지 묻었다. 퇴근 후 TV 보는 남편 옆에서 신혼의 아내는 그림을 그렸다.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차라리 그림을 사소. 돈은 내가 줄 테니.”
# 1년에 1점씩 모아라…그중 하나는 '효자'가 된다
그 한 마디가 수십 년 후 이런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 줄은 누구도 몰랐다. 1984년, 스물여섯 새댁의 생애 첫 컬렉션은 대개 그러하듯 판화였다. 컬렉션은 한운성 작가의 판화다. 당시 20만원을 줬는데, “판화 속의 손이 꼭 저를 부르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그래선지 20만원이라는 금액이 아깝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고. 당시 전세를 살 때였다. 남편이 개업한의사이지만, 당시는 대학교수라 월급이 88만원이었던 시절이라고 그는 또렷이 기억했다. 그만큼 그림 구입을 주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신혼 주부의 그림 구매는 지속됐다. 신진 작가의 유화 4점을 한 번에 90만원을 주고 구입해서 집으로 돌아올 때의 뿌듯했던 기분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때 같이 그림을 사러 다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거실에 걸어둘 그림 몇 점 사더니 그만 두더라고요. 저는 계속 샀어요. 더 좋은 그림이 나오는데 어떻게 안 살 수 있겠어요.”
조선 후기 최고의 컬렉터로 불리는 석농 김광국. 의관인 그의 수집품을 모은 화첩 ‘석농화원’에 발문을 써준 문인 유한준은 그림은 사랑하면 결국 모으게 된다고 했다. 안 대표에게도 그림 사랑의 종착지는 소장이었다. 안 대표는 초보 컬렉터들에게 꾸준히 작품을 구입할 것으로 권하면서 여건이 쉽지 않으면 1년에 1점씩이라도 꾸준히 모을 것을 제안했다. 그러다보면 그 중의 하나는 '효자'가 나온다는 것이다.
# 컬렉션의 출발은 좋은 화랑을 만는데 있다
그러나 꾸준히 모은다고 모두가 성공한 컬렉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안 대표는 자신이 성공한 컬렉터가 그 비결을 좋은 화랑을 만난데서 찾는다.
1990년대 들어 컬렉터로서 그는 한 차례 변신을 겪었다. 김창열, 박서보, 이우환, 정상화…. 단색화 작가로 불리는 중견 작가들의 작품을 사기 시작한 것이다. 기존에 갖고 있던 판화나 신진 작가 작품들을 부산에 있던 경매사에 내다 팔거나 주변에 선물했다. 고가의 작가로 갈아타기 시작한 것이다. 구입 가격은 작품 당 수백 만원에서 수천만, 수억원으로 뛰었다. 마침내 한국 작가론 최고 몸값인 김환기의 작품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에도 한 점에 6억, 7억원하는 작품을 몇 점씩 산 것이다. 한점 한점 산 게 백남준도 9점이 됐다.
미술시장의 국제화와 더불어 그도 외국작가에게 눈을 돌렸다. ‘땡땡이 호박 조각’으로 유명한 구사마 야요이, ‘LOVE’ 조각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공공미술 작가인 로버트 인디애나, 미국 팝 아트 작가 앤디 워홀의 작품이 그의 수집품이 됐다.
그는 이렇게 좋은 그림을 모을 수 있었던 건 좋은 갤러리를 만난 덕분이라고 한다. 대구의 인공갤러리와 그 뒤를 이은 시공갤러리다. 특히 타계한 인공갤러리 황현욱 대표는 단색화 작가들의 개인전을 선도적으로 열었고, 도널드 저드 등 현대미술사에 획을 그은 작가들의 개인전을 잇달아 개최하는 등 당시 한국 화랑계에서는 독보적 존재였다. 피악(FIAC, 파리현대미술아트페어)에 나가는 몇 안되는 화랑 중에 하나였다.
“단색화 전시는 대구에서 인공갤러리와 시공 갤러리에서 가장 많이 했어요. 제가 단색화 작가들의 좋은 작품을 살 수 있는 건 그런 덕분이지요. 인공갤러리 황 대표는 안목이 높기로 유명했다. 이우환 박서보 정상화 정창섭 김창열 작가의 개인전을 수도 없이 했다. 황현욱 선생이 돌아가시고 나서 시공갤러리로 넘어갔는는데, 시공 갤러리 이태 대표도 인공의 계보를 이어 단색화 작가 전시를 계속했지요. ”
# 미술도 투자다…포트폴리오에 미술이 들어가야
그림이 좋은 투자가 될 수 있다는 걸 느낀 것은 1990년대 초반이다. 당시는 컬렉터가 별로 없던 시절이었지만, 작품을 구경하고 사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1주일한번씩 서울에 왔다.
그런 아내를 바라보는 한 의사 남편은 어땠을까. 좋은 작가를 접할수록 그림 구매 가격은 높아졌고 어느 때는 남편을 속이기도 했다. 김창열 물방울 그림 30호짜리를 1500만원에 주고 사고는 700만원에 샀다고 말하는 식이다. 소나타 한 대 가격이 1500만원이던 시절이었다. 남편은 적당히 속아넘어가주고 아내의 그림 구입에 한번도 싫은 내색을 비치지 않았다. 그러던 남편이 어느 날 걱정 투의 말을 했다.
안 대표는 남편을 데리고 상경해 서울의 주요 갤러리를 돌았다. 이후 남편은 더는 말하지 안았다. 화랑가에 전시된 주요 작가들의 그림들을 보면 아내가 산 작품들의 가격이 모두 놀랄 정도로 뛰었음을 현장에서 확인했기 때문이다.그렇게 구입한 작품들은 갤러리를 개업하면서 어쩔 수 없이 팔았다. 개업 밑천이 된 셈이다.
안 대표의 미술품 컬렉션은 한의사인 남편의 지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수억원대 그림을 사는 아내를 탓하는 게 아니라 적금을 해약하고 사도록 밀어주기까지 했다. 아내의 안목과 사랑을 믿어준 남편. 갤러리 이름 리안도 자신의 성 앞에 남편의 성을 붙여 작명했다. 그렇게 고마움을 담았다.
컬렉터였던 그는 왜 화랑까지 차리게 됐을까. “시공갤러리 이태 대표가 돌아가신 후 인수자가 2년째 나타나지 않았어요. 대구의 작가들이 너무나 의지하는 갤러리인데 그렇게 사라져서는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그는 자신에게 인공갤러리가 그랬던 것처럼 컬렉터들에 등대 같은 갤러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컬렉션 노하우와 관련해 몇 가지를 요약했다.
“싼 작품에 현혹되지 마세요. 재테크의 일부로 미술 작품은 꼭 넣으세요. 작품 가격이 1000만원이 넘어가면 투자목적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제대로 된 작품은 언젠가 그 값을 하니까요. 뭘 살지 모르겠다고요. 한국에서 인정 받는갤러리에서 충분히 조언 받고 어떤 목적으로 사는지, 자금 규모는 어떤지 의논을 하면 되지요. ”
안 대표의 컬렉션은 월급쟁이 컬렉터에게는 상상 초월이다. 그러나 그가 지속적으로 모으는 행위가 미술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는 점, 그리고 가장 좋은 갤러리를 만나는 거야 말로 가장 좋은 출발임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교훈을 준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