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이지선 스토리 6] 병원서 생존 어려운 환자로 분류

입력 2017-01-28 07:02
지선아 사랑해’로 온국민에게 희망과 감동을 선사한 이지선씨가 한동대학교 교수로 임용됐다는 소식을 며칠전 전해드렸습니다. 이지선씨는 2002년 12월 국민일보 [나의 길 나의 신앙] 코너를 통해 소개하면서 화제를 얻었는데요. 당시 이지선씨가 우리 지면을 통해 전해준 감동 스토리를 다시 한 번 보시죠. 15년이 지났는데도 역경을 딛고 일어선 이지선씨의 스토리는 여전히 감동스럽습니다.

[나의 길 나의 신앙] 교통사고 딛고 새인생 이지선씨 (6)

국민일보 | 2002.12.12

사고후 며칠간 저는 의식이 있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했습니다. 타버린 몸이 부어오르기 시작해 눈,코,입까지 부어올라 정말 쳐다보기 어려울 만큼 흉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면회시간에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는 온몸이 부어올라 볼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움직이지 못하게 손발을 묶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엄마가 발을 묶은 끈을 풀어주어 발로 글씨를 썼습니다.

“여기 어디?” “병원이야,중환자실이야. 지선이가 다쳤어…” “언제 만나?” 엄마와의 첫 대화는 그랬습니다.

그전에 친척 한 분이 중환자실에 계셨던 적이 있어서 중환자실은 면회가 제한돼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한 것 같았습니다. 엄마는 하루에 세 번, 30분씩 만날 수 있었습니다. 면회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었고 정작 엄마를 만나는 시간은 너무 짧아서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는 것이 중환자실에서 있는 동안 화상 치료만큼이나 힘들었습니다.

또 가족에게는 제 생명만큼이나 중요한 문제가 한 가지 더 있었습니다. 저는 사고 당시 눈에 콘택트 렌즈를 끼고 있었습니다. 얼굴이 까맣게 타버렸는데 눈 안에서 렌즈가 녹아버린 것은 아닐까? 정말 그렇다면 이젠 지선이가 살아도 앞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닐까? 온 가족이 걱정했습니다.


몸이 퉁퉁 부어있었기 때문에 렌즈가 녹았는지 확인할 수 없는 며칠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사고가 일어난지 4일째 되던 날 부기가 조금 가라앉으면서 전혀 녹지 않은 렌즈를 꺼낼 수 있었고 그것을 간호사가 엄마에게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제 눈을 지켜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렸습니다.

심한 화상의 경우 대개 1주일이 생사의 갈림길이라고 합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병원에서는 저를 살 가망이 없는 환자로 분류하여 간호 스테이션에서 가장 가까운 침대에 두었습니다. 제가 2층 중환자실에 있던 40일간 그 침대에 있었던 환자 중에 살아서 나온 사람은 저 하나였습니다.

1주일이 생사의 고비라는 그동안 폐에 차 있던 가스를 제거하는 관도 빼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의사 선생님이 제 가슴을 두드리며 “이제 숨쉴 수 있지? 혼자서 숨쉴 수 있지?”라고 물으셨고 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목안 깊숙이 박혀있던 산소 튜브를 뽑아내었습니다. 그때의 시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엄마와 말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다 나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살기 위한,살아남기 위한 싸움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었습니다.


매일 아침 지옥같은 화상치료실에서의 치료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타버린 피부조직을 긁어내는 수술조차 금방 해주지 않았을 만큼 여전히 저는 살 가망이 희박한 환자였습니다. 그러나 저를 위해 눈물로,금식으로 기도해주셨던 정말 많은 분들의 사랑의 힘이 있었고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를 죽음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이곳에서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며 제게 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글로 전하고 있습니다.

정리=김병철기자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