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도히 흘러가는 역사의 물결 위에 떨어져 부유하는 나뭇잎 하나, 그리고 이를 담은 별 것도 아닌 한 장의 사진. 그것이 할리우드에 오면 훌륭한 한 편의 영화로 재탄생한다. ‘엘비스와 닉슨(2016)’.
1970년 12월 21일 백악관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와 리처드 닉슨이 만났다. 그리고 그들의 만남은 사진으로 찍혔다. 나름대로 유명한 사건이요, 사진이다. 한 사람은 ‘제왕’이라 불린, 어쩌면 전 세계에서 가장 추앙받는 톱스타였고 또 한 사람은 어쩌면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운명을 쥐고 있었을 미국 대통령이었던 만큼 미상불 눈길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또 어찌 보면 늘상 있을 법한 정치인과 연예인의 만남으로 그저 심상하게 지나칠 수도 있는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그러나 역시 할리우드. 라이자 존슨이라는 여성감독에 의해 이 사건은 흥미 있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1970년 12월 21일 이른 아침, 엘비스 프레슬리가 혼자서 백악관을 찾는다. 그리고 경비원에게 대통령 면담을 요청하는 편지를 전달한다. 이를 보고받은 닉슨 대통령은 처음에는 만남을 거부한다. 그러나 PR효과를 노린 참모들의 노력으로 엘비스를 만나게 된다. 닉슨을 만난 엘비스는 젊은이들의 마약 남용이며 히피운동 같은 이른바 반문화를 성토한다. 아울러 그 외에도 블랙팬더의 폭력 등 미국이 처한 각종 문제들을 열거하며 자신이 나서서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미국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돕겠다면서 자신을 비밀리에 마약수사 등을 담당하는 연방 비밀 특수요원으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한다. 처음에는 엘비스라는 인물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이다 차츰 엘비스와 의기투합한 닉슨은 그에게 명예 연방특수요원 뱃지를 수여한다. ‘하지만 엘비스는 그 어떤 비밀수사에도 참여한 적이 없다. 아니 있었나?’라는 자막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난다. 나라를 위해 마치 제임스 본드와 같은 역할을 맡아 봉사하겠다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좋게 말해 ‘나이브한’, 나쁘게 말해 ‘어린애 같은 충정’이 어떻게 미국 대통령과의 만남으로 이어졌는지, 그리고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그 과정을 코미디스럽게 그린 게 전부인 영화다.
물론 코미디라고 해서 배를 잡게 만드는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때로 상당히 코믹한 장면들이 등장한다. 이를테면 엘비스가 비행기를 타러 공항 대합실에 앉아있을 때 엘비스처럼 분장하고 차려입은 모창가수가 나타나 엘비스에게 말을 건다. “호오, 그럴 듯한데? 하지만 친구, 그건 아니지, 엘비스는 그런 옷을 입지 않아.” 진짜 엘비스를 자기처럼 가짜 엘비스인줄 오인한 가짜가 진짜를 진짜와 안 닮았다고 타박한다. 그러면서 그는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엘비스 노래를 부른다. 진짜 엘비스는 웃으며 박수를 치고. 그런가 하면 엘비스가 비틀즈를 마구 폄하하는 장면도 나온다. 심지어 그는 비틀즈를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당시 미국을 휩쓸던 히피, 마약 등 반문화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이를 공산주의에 물든 일부 뮤지션들이 조장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다. 비틀즈가 자신들의 음악이 엘비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술회한 데 비추면 매우 아이러닉하다.
어찌됐건 엘비스를 다룬 영화이니만큼 어떤 식으로든 엘비스의 노래가 나오리라고 짐작했다면 오산이다. 영화에는 엘비스의 노래가 한 곡도 들어있지 않다. 대신 영화 중간에 배경음악으로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의 ‘수지 큐(Susie Q)’가 깔리면서 엘비스가 이 노래를 따라 흥얼댄다. 또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갈 때는 샘 앤드 데이브의 ‘홀드 온 아임 커밍(Hold on I’m Coming)’이, 엔딩 크레딧 때는 블러드 스웨트 앤드 티어즈의 ‘스피닝 휠(Spinning Wheel)’이 흘러나온다. 모두 당시 크게 히트한 노래들이다.
이 영화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당연히 두 주인공을 맡은 배우들이다. 과연 얼마나 실제 인물들과 싱크로율이 높을까. 우선 엘비스역의 마이클 섀넌. 우리에겐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배우다. 그나마 국내에 얼굴을 알린 건 헨리 캐빌이 슈퍼맨으로 나온 ‘맨 오브 스틸(2013)’의 악역 조드 장군 역할 정도. 그러나 미국에서는 조연전문배우로 아카데미상과 골든 글로브 조연상 후보에도 얼굴을 올린 이름 있는 배우다. 얼굴 생김은 솔직히 전혀 엘비스스럽지 않다. 게다가 깊은 주름살로 인해 실제 엘비스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인다. 다만 베테랑 연기자답게 발음을 길게 끄는 듯한 엘비스 특유의 말투와 표정, 제스처 등은 봐줄만하다. 그래도 워낙 닮지 않은 외모 탓에 영 만족스럽지 못하다. 엘비스 전기영화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해도 그렇다. 그래선지 닉슨 역을 맡은 케빈 스페이시가 훨씬 눈에 띈다. 헤어스타일을 닉슨 특유의 M자형으로 만들고 배도 불룩 나오게 분장한 스페이시는 완전히 다른 얼굴 생김에도 불구하고 닉슨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해내 ‘과연’이라는 감탄사가 나오게 만든다.
섀넌의 엘비스에 실망해서 그랬을까, 엘비스를 연기한 다른 배우들이 생각났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이런저런 영화에서 이 유명한 가수 겸 배우를 연기한 배우는 무려 37명이나 된다. 확실치는 않지만 한 사람을 연기한 배우들의 숫자로는 아마도 가장 많지 않을까 싶다. 그중 가장 그럴듯했거나 특색 있었던 이들을 보면 이렇다.
①커트 러셀=아역배우에서 출발해 톱스타까지 오른 그는 엘비스를 연기한 배우들 가운데 가장 훌륭했다는 평을 가장 많이 받는다. TV영화인 ‘엘비스(Elvis-the Movie, 1979)’에 출연했다.
②돈 존슨=TV 시리즈 ‘마이애미 바이스’로 유명세를 떨친 미남배우로 엘비스와는 그리 많이 닮지 않았지만 표정연기는 매우 흡사했다. 역시 TV영화인 ‘엘비스와 뷰티 퀸(Elvis and Beuty Queen, 1981)’에 출연했다.
③조나산 리스 마이어스=가장 최근에 나온 엘비스 전기영화의 주인공. 영국 출신이어서 다소 의외의 캐스팅으로 여겨졌으나 결과적으로 잘한 선택이었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 TV 미니 시리즈 ‘엘비스(2005)’에 출연.
④브루스 캠벨=샘 레이미의 ‘이블 데드’ 시리즈로 잘 알려진 호러 코미디 배우. 대부분 사실을 다룬 전기영화에 속했던 여타 엘비스 영화와 달리 엘비스를 가공의 히어로로 등장시킨 픽션 ‘버바 호텝(Bubba Ho-Tep, 2002)’에 출연했다.
⑤로버트 패트릭=‘터미네이터 2’에서 액체금속 로봇 T-1000역을 맡아 유명해진 배우. 그는 엘비스가 늙도록 살았다는 가정 아래 75세가 된 늙은 모습의 엘비스를 연기했다. 비록 늙었지만 이 가공의 미스테리 코미디 ‘외로운 거리(Lonely Street, 2009)’에서도 엘비스는 히어로로 나온다.
⑥릭 피터스=‘엘비스와 닉슨’의 원작이라고 해도 좋을, 똑같은 내용을 다룬 ‘엘비스, 닉슨을 만나다(Elvis Meets Nixon,1997)’에서 엘비스로 나왔다. 대단히 엘비스와 흡사한 외모를 보여주었지만 그게 다였을 뿐 배우로서 성공하지 못했다.
한편 이들 37명에는 속하지 않지만, 즉 엘비스라는 타이틀을 달고 연기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엘비스라고 짐작되거나 엘비스를 흉내낸 인물을 연기한 배우들도 적지 않다. 발 킬머. ‘더 도어스(1991)’에서 로커 짐 모리슨을 연기했던 그는 이에 앞서 1984년 데뷔작인 ZAZ사단의 요절복통 코미디 ‘특급비밀(Top Secret)’에서 엘비스를 패러디한 인물을 연기하면서 엘비스식의 멋진 노래와 춤을 선보였다. 또 니콜라스 케이지도 데이빗 린치의 ‘광란의 사랑(Wild at Heart, 1990)’에서 엘비스를 흉내냈다. 그런가 하면 짐 캐리는 실존 코미디언 앤디 코프먼의 전기영화인 ‘맨 온 더 문(Man on the Moon,1999)’에서 코프먼의 장기인 엘비스 흉내를 고스란히 재현하면서 전율할 만큼 재미있게 엘비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면 앞으로 누가 또 37명에 이어 엘비스 역할에 도전할까. 알려지기로는 바즈 루어만 감독 연출로 곧 엘비스 전기영화가 만들어지리라고 한다. 알다시피 루어만은 ‘로미오+줄리엣(1996), ‘물랭 루즈(2001)’, ‘위대한 개츠비(2013)’ 등으로 유명한 감독이다. 그의 영화에서 엘비스역으로 물망에 오르는 배우들은 그가 즐겨 기용하는 레오나르도 디 캐프리오를 비롯해 조셉 고든 레빗, 토비 맥과이어, 제임스 프랑코, 유안 맥그리거 등이 있다. 다만 디 캐프리오는 엘비스를 발굴하고 조니 캐쉬와 제리 리 루이스 같은 스타들을 키워낸 선 레코드사의 설립자 인 팝계의 선구자 샘 필립스의 전기영화에서 타이틀롤을 맡을 것이라는 보도가 있어 그럴 경우 엘비스 역할은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엘비스와 닉슨’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든 할리우드 손에 걸리면 영화가 된다. 우린 왜 ‘무엇도 아닌’이 아니라 ‘무엇’이 있는데도 그걸 가지고 멋진 영화를 못 만드는 걸까?”
김상온 (프리랜서 영화라이터)
[김상온의 영화이야기]<106> 37명의 엘비스
입력 2017-01-24 1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