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구속수감을 가장 반기는 이들은 누구일까. 김 전 실장이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 대공수사국 부장과 법무부 장관 등으로 재직할 때 극심한 고초를 당했던 이들이 아닐까 싶다.
김 전 실장이 서울구치소에 구속수감된 지 하루 만인 22일 초췌한 모습으로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출두했다. 양손에 수갑을 찬 김 전 실장의 모습은 권불십년(權不十年)의 무상함을 엿보게 했다. 성창호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블랙리스트의 작성과 관리를 주도한 혐의(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김 전 실장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대한 영장실질심사에서 “범죄 혐의가 소명됐고 이들이 증거 인멸을 시도했거나 장차 시도할 염려가 있다”고 구속 사유를 설명했다.
김 전 실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각계에서 다양한 목소리들이 쏟아졌다. 야권 대권주자들은 헌법 파괴 행위를 엄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블랙리스트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한 중대 범죄”라며 “낱낱이 진상이 규명되고 책임자들은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안철수 전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는 “범죄의 몸통은 대한민국 대통령이다. 헌법을 수호해야 할 대통령이 헌법이 명시한 표현의 자유를 유린한 것”이라며 “박 대통령을 탄핵해야 할 사유들 가운데 이 사안이 가장 심각하고 위중하다”고 강조했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김기춘은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의 핵심 인물이며 박정희 시절부터 박근혜에 이르기까지 각종 조작사건을 진두지휘했던 추악한 인물”이라며 “김 전 실장 같은 자들의 악행에 힘입어 독재가 강화됐고, 민주주의는 파괴됐다”고 말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국정농단과 헌법 유린의 진짜 몸통인 대통령만 남았다. 조속히 수사해 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주문했다.
블랙리스트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를 본 문화·예술계는 김 전 실장과 조 전 장관의 구속을 환영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박근혜 퇴진과 시민정부구성을 위한 예술행동위원회’는 “김기춘과 조윤선의 구속만으로 블랙리스트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끝나지 않았다”며 “블랙리스트의 완전한 실체 규명과 그 행위에 가담한 부역자들의 구체적 책임을 묻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돌입할 것”이라고 말했다. 21일 열린 촛불집회에서도 김 전 실장과 조 전 장관의 구속을 환영하고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구호나 피켓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들보다 더욱더 김 전 실장의 구속수감을 반기는 이들이 있을 것 같다. 바로 김 전 실장이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부장과 법무부 장관 등으로 재직할 때 육체적·정신적 고초를 당했던 이들이다. 이들은 그동안 김 전 실장을 ‘역사의 법정’에 세우기를 간절히 고대했던 피해자들이다.
최근 SBS가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공개한 피해자들의 증언과 김 전 실장이 언론에 밝힌 내용 등을 보면 김 전 실장이 얼마나 조작에 능했고, 자신의 혐의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는지 알 수 있다. 김 전 실장은 1975년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부장 시절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조작 사건’의 수사 책임자였다. 공안정국을 만들기 위해 한국말도 서툰 재일동포 유학생들을 고문해 조작한 사건이었다. 피해자들은 영문도 모르고 죽기 직전까지 맞았다고 증언했다. 이 사건은 최근 재심을 통해 무죄임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김 전 실장은 이 사건을 부인했다. 뉴스타파 최승호 PD가 2015년 11월 김포공항에서 김 전 실장을 만나 “1975년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조작 사건에 대해 여쭙고 싶다”고 말하자 김 전 실장은 “알지 못한다”고 잡아뗐다. 최 PD가 “간첩 조작 등의 이유로 많은 사람이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때 수사 책임자였는데 상관없는 일은 아니겠죠”라고 질문하자 김 전 실장은 “나는 수사한 적이 없다”고 답했다.
피해자들과 수사관들의 증언과 비교하면 김 전 실장은 새빨간 거짓말을 한 것이다. 김 전 실장은 다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간첩은 머리, 두뇌로 잡는 것이지 몽둥이로 잡는 것이 아니다. 제가 수사한 사건으로 무슨 과거사 진상규명이나 인권 의문사나 이런 리스트에 오른 게 없다”고 강변했다.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들은 담담히 증언하고 있다.
“억울하다거나 그런 생각은 이상하게 잘 안 들더라고요. (중략) 내 조국이 가장 어둡고 힘들고 괴로웠던 시기에 그래도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바칠 수 있었다면 행복이 아니겠느냐.”
“거짓이나 변명이 통하지 않는 곳이 역사의 법정입니다.” 이들의 입장은 명백한 사실도 부인하는 김 전 실장의 발언과 크게 대비된다.
김 전 실장이 법무부 장관 시절 발생한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도 김 전 실장의 ‘작품’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다. 분신한 김기설씨의 유서를 대신 작성했다는 혐의로 구속기소된 강기훈씨는 1992년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만기 복역했다. 강씨에 대한 유죄 확정 판결이 난 지 23년 만인 2015년 5월 대법원은 강씨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은 당시 노태우 정권이 시민들의 민주화 시위를 무력화하고 짓밟기 위해 조작한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렸다.
김 전 실장은 1992년 10월 법무장관직에서 물러나고 두 달 뒤인 그해 12월 ‘초원복집사건’의 주동자로 활약했다. 그는 당시 부산지역 기관장들을 모아놓고 지역감정을 조장해 김영삼 후보에게 힘을 실어 주는 방안을 논의했다. 김 전 실장은 처벌을 받지 않았고 정주영 후보 측 인사들만 처벌을 받았다.
이런 김 전 실장이 22일 특검에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혐의와 윗선의 지시 의혹을 완강히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23일 특검팀에 참고인 신분으로 출석해 “(블랙리스트 작성과 관리 문제는) 김 전 실장이 청와대에 들어온 뒤 주도한 범죄 행위”라고 비판했다.
과거에 행해진 조작사건들과 관련해 김 전 실장을 역사의 법정에 세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조만간 블랙리스트의 작성과 관리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법률 미꾸라지'인 김 전 실장이 법망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처벌을 받도록 특검팀이 만반의 준비를 다해야 한다.
염성덕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sdyu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