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결혼한 지 11년이 됐다. 10주년이 되면 애들과 함께 해외여행을 가기로 약속했는데 지난해 이맘때 인영이가 아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아내는 결혼기념일에 집에 있기 싫은 눈치였다. 인영이도 상태가 좋고 해서 결혼기념일을 끼고 가까운 대천으로 1박2일 여행을 다녀왔다. 대천은 결혼 전 아내를 꼬실 때 처음 갔던 여행지다. 만난지 한달 정도 된 어느 봄날, 조개구이에 소주를 마시며 감언이설로 아내의 마음을 흐트려뜨렸다.
12년 만에 다시 찾은 대천의 밤은 그때와 달라도 너어무~ 달랐다. 30대와 20대로 파릇파릇했던 우리 부부는 어느새 같은 40대가 되어 있었다. 조개구이를 서로의 입에 넣어주며 달콤한 말을 속삭이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이 아이들을 하나씩 붙잡고 대하 살을 발라주고 있었다. 윤영이가 가고 싶다고 간 노래방에서 아내는 20년 전 유행하는 노래를 불렀고, 나는 윤영이 부를 노래를 찾아주며 잠든 인영이를 안고 있었다. 집에서 가져 온 와인을 마시면서 분위기를 잡으려했지만 윤영이는 아빠엄마 둘이 있는 꼴을 못 보는지 밤 12시까지 초롱초롱. 결국 아내는 아이들과 방 침대에서 잠들었고, 나도 곧 초장 묻은 러닝을 입은 채 거실에서 코를 골았다.
아내를 좋아했던 이유는 나와 달랐기 때문이다. 아내는 외고에서 전교1등을 놓치지 않고 S대를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모범생이었다. 반면 나는 공부보다 농구가 전공인 지각대장이었다. 아버지가 고3 담임선생님께 합격 감사 전화를 드렸을 때 선생님의 첫 반응은 “성규가요?” 였다고 한다. 아내는 은행을 다니며 두 동생들의 서울 생활을 뒷바라지한 효녀였고, 나는 용돈은 꼬박꼬박 입금했지만 일주일에 전화 한통 할까 말까한 ‘무늬만’ 효자였다. 나는 독실한 기독교가정에서 자랐고, 아내는 뿌리깊은 불교 집안이었다. 무엇보다 아내는 연애초짜였고, 나는 연애박사였다.
집안 보태느라 모아놓은 돈이 별로 없다는 아내에게 내가 한 이천 정도 모았다며 둘이 벌면 금방 집사고 잘 살게 될 거라며 연애 6개월 만에 결혼에 골인했다. 결혼한 뒤 통장을 달라는 아내에게 마이너스 이천짜리 통장을 건네면서도 떳떳했던 철없는 남편이었다.
결혼생활은 힘들었다. 나와 다른 점이 좋아 결혼했는데 하고 나니 다른 점이 불편했다. 일주일에 5번은 술을 먹어야 제대로 된 기자라는 신념을 갖고 있던 나에 비해 아내는 남편과 모든 것을 함께하고 싶어 하는 ‘집순이’였다. ‘인생은 결국 혼자다’라는 개똥철학을 버리지 못하는 나를 아내는 이해하지 못했다. 결혼 3년차 윤영이가 태어나기까지 전쟁의 연속이었다. 순하던 아내도 전사가 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둘째 인영이를 낳은 뒤로는 전쟁에서 나는 백기투항 했다. 예쁜 딸을 둘이나 낳아준 아내이기에 더 이상의 전투는 무의미했다. 정권은 5년마다 바뀔 수 있지만 절대 권력은 무한하다는 진리를 뒤늦게 깨달았다고 해두자. 파업 후유증으로 힘들어하던 나는 세종을 지원했고 아내에게 지방근무를 강요했다. 두 아이를 키우느라 4년을 육아 휴직한 아내는 승진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다음번에는 승진이 확실할 것 같다며 전의를 불태우던 아내는 인영이가 아프면서 다시 휴직계를 냈다. 여행길에서 아내는 자기 같은 여자 대리를 회사 내에서 ‘늑대(늙은대리)’라고 부른다며 웃었다. 11년 동안 그래도 하고 싶은 거, 해야 할 것 다 하고 살았던 나에 비해, 아내는 엄마라는 이유로 희생하고 손해만 보고 살았다. 그러면서 아내는 가정을 지켰다. 철 안든 남편을 다독이며 때론 혼내며 여기까지 우리 가정을 끌고 온 건 8할이 아내 덕이다. 대천 가서도 하지 못한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올 봄에는 아내의 소원인 해외 가족여행을 꼭 한번 가야겠다.
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