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 특별검사팀이 1라운드에서 쓴맛을 봤다. 특검팀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상대로 청구한 구속영장을 법원이 기각했다. 이 부회장이 ‘한판승’을 거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1라운드에서 기대 이상의 ‘유효 판정’을 따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 영장실질심사의 초점은 삼성이 최순실씨 등에게 건넨 돈의 성격이었다. 삼성은 미르·K스포츠재단과 최씨의 코레스포츠(현 비덱스포츠),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430억원을 지원했거나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이는 검찰과 특검 수사결과 드러난 객관적 사실이다.
이 돈의 성격을 놓고 특검팀과 삼성은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특검팀은 삼성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등 이 부회장의 원활한 경영권 승계를 위해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의 도움을 받으려고 최씨 등에게 뇌물을 준 것으로 판단했다. 특검팀이 이 부회장에 대해 뇌물공여, 제3자 뇌물공여, 횡령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한 것도 이런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삼성은 박 대통령과 청와대 등의 ‘강요·공갈·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자금을 지원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삼성은 이 부회장이 박 대통령으로부터 질책과 함께 구체적인 액수 지원 요청까지 받았다고 주장했다. ‘제왕적 대통령’의 위세에 눌린 피해자라는 논리를 전개했다.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법원이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결과적으로 삼성 주장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조의연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19일 특검팀의 구속영장 청구 요지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는 “뇌물범죄의 요건이 되는 대가관계와 부정한 청탁 등에 대한 현재까지의 소명 정도, 각종 지원 경위에 관한 구체적 사실관계와 그 법률적 평가를 둘러싼 다툼의 여지, 관련자 조사를 포함해 현재까지 이루어진 수사 내용과 진행 경과 등에 비추어 볼 때, 현 단계에서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 상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조 부장판사는 ‘대가관계’ ‘소명 정도’ ‘법률적 다툼의 여지’ 등 이런저런 이유를 거론하며 구속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조 부장판사가 특검팀의 법리 구성을 정면으로 지적한 것이다.
물론 구속영장 기각은 혐의의 유·무죄와 직접적 관련이 없다. 법원이 구속영장을 기각했다고 해서 이 부회장 등의 혐의가 없었던 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이 부회장을 비롯한 삼성 고위층과 박 대통령 등의 유·무죄 여부는 앞으로 재판과정에서 밝혀질 것이다.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면서 특검팀의 수사 동력이 약화될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특검팀은 외견상으로는 차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규철 특검팀 대변인은 법원의 영장 기각에 대해 즉각 유감의 뜻을 나타냈다. 이 대변인은 “법원의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 기각 결정은 특검과 피의사실에 대한 법적 평가에 있어서 견해 차이가 있다고 판단된다”면서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 결정은 매우 유감이나 필요한 조치를 강구해 흔들림 없이 수사를 진행할 예정이고 정례 브리핑 때 관련된 질문을 받겠다”고 말했다.
특검팀 수뇌부와 대책회의를 한 이 대변인은 이날 오후 정례 브리핑을 했다. 이 대변인은 “이 부회장에 대한 영장 재청구 여부는 현재까지 결정되지 않았다. 특검은 법원의 영장 기각 사유를 면밀히 검토한 후 내부 회의를 거쳐 향후 처리방향을 결정할 예정이다”며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이 부회장에 대한 재소환 여부는 필요에 따라 결정될 문제”라고 말했다. 재소환을 통한 보강 수사 가능성을 열어놓은 발언으로 볼 수 있다.
이 대변인은 “영장실질심사 때 이 부회장이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박 대통령의 강요나 협박이 있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그런 주장을 한 걸로 안다. 특검 입장에서는 그런 주장을 납득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 대변인은 “나머지 세 명(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최지성 부회장, 장충기 사장, 대한승마협회장인 박상진 삼성전자 대외담당사장)에 대한 불구속 수사 원칙은 현재까지 변동이 없다”면서 “최지성 부회장은 피의자 신분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특검팀은 박 대통령 대면조사와 다른 대기업 수사도 차질 없이 진행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 대변인은 “박 대통령의 대면조사는 수사 일정을 봤을 때 2월 초순에 반드시 해야 될 상황”이라면서 “(이 계획은) 변동된 사정이 없다”고 밝혔다. 그는 “2월 초순 대면조사를 하려면 박 대통령 변호인들과 논의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에 “문제가 없도록 사전 조율이 필요한 절차를 취하도록 하겠다”고 설명했다. 그는 “향후 다른 대기업 수사는 구속영장 발부 여부와 상관없이 계속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검팀은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를 확신했다가 법원의 펀치를 맞은 셈이 됐다. 법조계에서는 수사 추진력이 떨어지고 수사 일정에 차질을 빚을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과연 특검팀이 박 대통령과 다른 대기업 수사를 앞두고 어떤 반전 카드를 꺼낼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염성덕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sdyu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