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분의 아이들 세상] 우리 아이가 혹시 분노조절 장애?

입력 2017-01-12 13:24
이호분 연세누리 정신과 원장


‘분노 사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이다시피 분노에서 비롯된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헤어지자고 말하는 여자 친구를 살해하고, 층간 소음 문제나 주차 분쟁으로 이웃을 살해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여성 혐오에서 비롯된 살인 등 묻지마 살인 사건이 잇따르고 아무런 저항 능력이 없는 어린이집 아동을 마구잡이로 학대하는 사건도 보도된다.

이러다보니 ‘분노 조절장애’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사실 분노 조절장애는 공식적인 진단 명칭은 아니다. 충동조절 장애라는 큰 카테고리에 방화광, 병적 도박, 병적 도벽 등의 질환과 간헐성 폭발 장애가 속해 있다.

어쨌든 분노 조절장애라는 말이 언론에 회자된 이후 “우리 아이가 분노 조절 장애인거 같아 겁이 난다”며 병원을 찾는 부모들이 많아졌다.

J는 초등학교 5학년 남자 아이다. J는 학교서 친구에게 화가 나면 선생님 앞에서도 식판을 엎어버린다. 심지어 교무실에 커터 칼을 들고 뛰어드는 행동도 했다. 동생과 싸우다가 동생에게 식칼을 휘두른 적도 종종 있다고 했다. 

J는 부모님에게도 화가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대드는 아이였다. 아이의 이런 행동은 3학년 때 2년간 캐나다에 어학연수를 다녀와 한국 학교에 온 후에 시작됐다. 자세히 아이와 면담을 해 보니 J는 간헐적인 환청을 경험하고 있었다.

K는 초등학교 4학년 남자 아이다. 어릴 때부터 행동이 산만하고 장난기가 많았다. 하지만 머리가 좋고 창의적인 생각을 많이 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레고 블록을 하거나 과학 관련 책을 읽을 때는 굉장히 몰입해 밤을 새울 정도로 놀라운 집중력을 가진 아이였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가서 하기 싫은 분야 공부에 전혀 집중을 못하다보니 선생님에게 자주 야단을 맞게 됐다. 부모님에게도 꾸중을 자주 듣고 체벌까지도 받았다. 2학년 정도 되니 친구들이 지나가다 스치기만 해도 쫓아가서 때리고 모임에서도 자기 주장이 강해 다툼이 자주 일어난다고 했다. 다툼 끝에 주먹을 휘두르는 일도 잦다 보니 친구들은 K를 멀리하고 두려워했다. 4학년이 되니 따돌림을 받게 됐고 그러자 충동적인 행동은 더 늘었다.

L은 초등학교 5학년 남자 아이다. 머리가 좋고 공부는 최상위권을 유지했지만 짜증이 심하고 학교에서는 순간 욱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집에서는 부모님에게 순종적이고 거역하는 일이 없었다.

L의 엄마는 학교 선생님이 아이에 대해 평가하며 공격적이라고 하자 이를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5학년이 된 후 집에서도 아빠가 없을 때 엄마를 밀치고 소리지르고 욕하는 모습을 보게 된 후 아들을 병원에 데리고 왔다.

열거한 세 명의 아이는 모두 분노조절 장애인 거 같다며 병원을 찾았지만 J는 조울증, K는 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L은 ‘부모-자녀 관계 문제’로 진단되었고 치료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처럼 사소한 일에 분노를 과도하게 폭발하는, 동일한 문제를 호소하는 아이들도 원인은 퍽 다양할 수 있다. 생물학적 문제, 가족의 문제 , 또래 관계의 문제 등등에 관해 현미경적인 평가가 이루어져야 하고 치료 계획이 수립돼야 한다.

하지만 ‘분노를 유발하는 사회’에 대한 치유가 없다면, 그리고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없고 부가 독점돼 많은 이들의 기본적인 생존권도 지켜주지 못하는 사회에서 받은 상처에 대한 치유가 없다면, 현미경적 진단과 치료만으론 분명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지는 요즘이다.

이호분(소아정신과 전문의, 연세누리 정신과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