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소통이 연결된 고무 튜브를 코에 꽂고 있는 임성준(14)군에게 성인 180여명이 꽉 들어차 있는 법정(法廷)은 너무나 답답해 보였다. 6일 오전 10시30분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 가습기 살균제를 만들어 판 신현우(69) 전 옥시레킷벤키저(옥시) 대표 등 19명에 대한 1심 선고공판이 열렸다.
유해 물질이 함유된 가습기 살균제가 임군의 폐 속으로 들어간 건 그의 첫 돌 직후였다. ‘급성 호흡 심부전증’이란 병명과 함께 호흡보조기를 달고 생활해 온 시간도 12년이 흘렀다.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검은색 모자를 쓴 임군은 손에 쥔 생쥐 인형을 말없이 만지작거렸다. 어머니 권미애(41)씨가 그런 임군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재판 시작 3분 전, 녹색 수의를 입은 신 전 대표와 피고인 18명이 피고인석에 들어섰다. 방청석에서 ‘신현우’라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녹색 수의를 입은 신 전 대표를 비롯한 구속 피고인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침통한 표정의 신 전 대표는 미동이 없었다. 온몸이 화석처럼 굳어보였다. 고개를 들고 있는 건 정장 차림의 존 리(49) 전 옥시 대표뿐이었다.
재판장인 최창영 부장판사와 두 배석판사가 법정에 도착했다. 방청석 180여명이 모두 기립했다.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 판결을 선고 하겠습니다.” 최 부장판사의 말에 임군이 권씨 품으로 파고들었다. 일반인에게도 숨 막히는 엄숙한 분위기가 어색한 듯 했다.
최 부장판사가 방청석을 향해 당부했다. “이번 사건 판결문은 모두 합해 300쪽 넘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중요 부분만 요약하겠지만 선고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재판부가 선고를 끝마치고 퇴장할 때까지 정숙을 유지해 주시길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먼저 신 전 대표 등의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 부분입니다….”
‘1997년부터 가습기당번과 관련한 백화현상(가습기 수증기 분출구에 하얀 가루가 생기는 현상) 등 소비자 클레임이 접수되자….’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을 한 번 사용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추천과 함께….’
‘흡입 독성 실험, 원인미상 폐 질환…’
임군의 폐 속으로 들어가 평생 돌이킬 수 없는 질병을 일으킨 화학 원료들의 이름과 의학 용어들이 법정에 떠다녔다. 선고 내용을 받아 적는 취재진의 노트북 소리만이 작게 울렸다.
"그 안전성을 철저히 검증하고 위험성이 제거됐다고 판단하기 전에는 판매에 주의를 기울였어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눈을 감은 채 선고 내용을 경청했다. 방청석에 앉은 한 노년 여성은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임군이 권씨를 바라보며 "엄마"라고 읊조렸다.
"제품을 사용해도 안전한 지 흡입독성실험을 직접 실행하거나 다른 기관에 의뢰하지 않았습니다."
"옥시 대표이사로서 어떠한 추가 검증도 없이 ’아이에게도 안심‘이라는 거짓 표시 문구를 사용하게 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권씨가 임군의 왼손을 꽉 쥐었다.
"그러나 2009년 이전 사망하거나 피해를 입은 1·2차 피해자들이나, 2010년 이전 사망하거나 피해를 입은 3차 피해자들에 대한 업무상과실치사상 죄는 각 공소시효가, 완성되었습니다…."
최 부장판사가 문장을 끝맺으며 ‘하’라는 탄식을 터뜨렸다. 그 소리는 법대 위 마이크를 통해 대법정 전체에 설치된 스피커에 울려 퍼졌다. 피해자 가족들 입에서도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리 전 대표 경우에는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피고인들 일부에게는 무죄가 선고됩니다. 이제 양형 이유를 설명드리겠습니다."
방청석이 술렁였다.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피해자들 상당수는 어린 아이들과 이들을 양육하는 부모들이었습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보다 깨끗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하도록 가습기 살균제를 구매해 사용했을 뿐인데도, 그로 인해 발생한 사상(死傷)의 결과가 결코 그들 잘못이 아님에도, 자신이 직접 구입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배우자와 자녀를 죽거나 다치게 했다고 자책하며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권씨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피고인들에게는 법이 허용하는 한도에서 가장 엄중한 책임을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앞서 양형 범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신 전 대표 등에게는 징역 7년이 우리 법원이 선고할 수 있는 법정 최고형입니다.”
권씨가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눈가를 훔쳤다. 임군이 그런 권씨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신 전 대표 등 피고인들은 선고가 내려지자 모두 기립해 움직이지 않았다.
이날 무죄를 선고받은 리 전 대표는 뚜벅뚜벅 법정을 걸어나갔다. 임군은 휠체어에 산소통을 싣고 법정 경위들의 도움을 받아 법정을 나섰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