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국 정계에서 가장 핫한 인물 중 한 명을 고르라면 단연 보리스 존슨 외무장관이다. 영국 BBC방송 조차 성(姓) 대신에 이름을 부르는 흔치 않은 정치인 ‘보리스’는 부스스한 헤어스타일에 막말 등 튀는 발언으로 괴짜 이미지가 강하다.
장관이 된 이후 한동안 자제하는 듯 했던 그의 거침없는 돌직구 화법이 최근 영국 정치판은 물론 국제외교가를 뒤흔들었다. 동맹국인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해서 직설적으로 가차없이 비판했기 때문이다. 그의 발언이 알려지면서 영국 정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알면서도 그 누구도 말하기 힘든 사실을 말했다”는 점에서 진보 매체를 중심으로 한 언론들은 보수 진영의 이 정치인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쏟아냈다.
◇보리스 존슨, 무슨 말 했길래…
존슨 외무장관은 지난 1일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해 이슬람 종교를 왜곡·남용하고 중동에서 대리전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중동 관련한 컨퍼런스에 참석한 존슨 장관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른 종파들을 왜곡하고 공격하는 정치인들이 있다"며 “이것이 중동의 가장 큰 정치적 문제 중 하나다. 이 지역에서 대리전이 전개되는 것은 이 지역 국가들에 강력한 리더십이 없기 때문이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수니파 혹은 시아파를 뛰어넘어 상대편에 다가가 사람들을 통합하려고 하는 큰 인물들이 없다. 이것이 비극이다"며 “비전을 가진 리더십이 중동에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것이 사우디와 이란 모두가 꼭두각시 조종자들(puppeteer)이 되어 대리전을 벌이는 이유"라고 말했다.
◇곤혹스러워하는 영국 정부
존슨 장관의 발언이 전해지자, 막 중동 국가 정상들을 만나고 돌아온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이달 초 중동 바레인에서 열린 걸프협력회의(GCC) 정상회의에 참석해 "레바논, 이라크, 예멘, 시리아를 비롯해 걸프 지역에서 이란이 감행하는 공격적 움직임에 함께 대처하겠다"고 약속했다. GCC는 이란의 숙적 사우디를 중심으로 아랍에미리트(UAE),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오만 등 수니파 왕정 6개국의 지역 연대 조직이다.
메이 총리는 또한 GCC 정상들과 만찬을 함께 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사우디 왕가의 개혁을 칭찬했으며, 수년간 영국에 안보서비스를 제공한 데 대해서도 감사를 표했다. 메이 총리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 사활을 걸고 걸프 지역 나라들과 무역 협정 체결을 추진 중이다.
예상치 못했던 존슨 장관의 발언에 당황한 영국 정부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지난 7일 영국 외무부는 존슨이 지난 주말 ‘BBC 앤드루 마 쇼’에 나와 사우디에 대한 강한 지지를 표명했다며, 그의 비판은 예멘과 시리아와 같은 분쟁 지역 내에서 강력한 지도자들이 없는 현실을 언급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외무부 대변인은 “(존슨) 외무 장관이 지난 11일 의견을 밝혔듯이 우리는 사우디의 동맹국이며, 사우디의 영토 확보와 국민 보호 위한 노력을 지지한다. 이에 반하는 어떠한 제안도 잘못됐으며,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고 밝혔다.
총리실은 존슨 장관의 발언들은 개인적인 견해일 뿐 "정부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해명했다. 마이클 팰론 국방장관은 여기서 한 술 더 떠 언론들이 존슨의 발언을 오보했다며, 메이 총리와 존슨 외무장관 간의 균열을 외면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언론과 정치권의 사뭇 다른 평가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의 맹주로서 사우디와 이란이 종파 다툼을 주도해온 것을 사실 어제 오늘이 아니다.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 역시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영국의 외교 수장이 공개 석상에서 우호관계에 있는 사우디를 비난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BBC는 존슨 장관의 발언이 '다소 진실'이기는 하지만 메이 정부에는 “매우 거북한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진보 성향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존슨 외무장관이 동맹국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지 않는 영국 외무부의 오랜 관행을 깼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 매체는 8일자 사설을 통해 존슨 장관이 “의도없는 솔직한 발언을 했다”고 평하면서도, 직언은 즉흥적이어선 안되고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가령 사우디의 대리전 수행에 대한 비판은 무기 수출 중단 등 구체적인 대응방안을 언급해야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다.
대중지 더 선은 지난 12일 “존슨의 사우디 비판이 옳지만, 사우디의 석유가 필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과 거래를 해야 한다”는 칼럼을 게재했다. 그러면서 존슨 외무 장관이 사우디에 관한 ‘침묵의 규율’(omerta)을 깬 데 대해 메이 총리로부터 질책을 받았다고 전했다. 진보 매체 인디펜던트는 지난 8일 존슨이 조롱이 아닌 칭찬을 받을 만하다는 일각의 주장을 실었다.
하지만 노동당 소속 에밀리 손베리 그림자 내각 외무장관은 ‘지저분한 위선’(shabby hypocrisy)이라며, 존슨 장관과 정부의 태도를 싸잡아 비판했다. 손베리는 영국이 사우디에 무기를 팔고 있는 현실을 꼬집으면서 “정부는 사우디의 군사 작전에 대해 비판할 수 없다”고 말했다.
톰 브레이크 자유민주당 외무담당 대변인은 “인권을 무시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역을 추진하려 했던 ‘더러운(grubby) 걸프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메이 총리에게 이번 일은 굉장히 당혹스러웠을 것”이라고 밝혔다.
영국 하원 상임위원회인 정보안보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말콤 리프킨드(70) 영국 전 외무장관은 존슨 장관이 위험한 사람이라며 자진 사퇴를 촉구했다. 존슨의 ‘유명인사 기질’(celebrity temperament)이 외무 장관직에 맞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리프킨드는 “보리스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이는 그의 본질 및 기질의 일부다”며 “존슨이 정부의 다른 요직을 맡는 편이 더 나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진실인 줄 알면서도 정치적 부담때문에 터부시되는 얘기를 "보리스가 했다"는 네티즌 댓글이 달리는 등 존슨 장관을 지지하는 여론도 상당하다.
<뉴시스>